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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부회원 인터뷰]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꿈 – 노승진 기부회원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 대한민국의 인권변호사 故조영래

 

 

  탄탄대로의 성공으로 보장된 길을 뒤로 하고 서슬 퍼런 국가 권력의 반대편에서 사회의 약자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대한민국 인권변호사 故조영래가 아들에게 남긴 이 말처럼, 하루하루 주위의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스무 살 소녀가 있다. 바로 공감의 노승진 기부회원이다. 여느 새내기 대학생처럼 학교 과제에 바쁘고, 친구들과의 수다가 자연스러운 그녀지만,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롤모델은 바로 70, 80년대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한 조영래 변호사라고 한다. 그 때문일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변호사의 꿈을 꾸고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대법원 법률 봉사부터 공감의 청소년 행사에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방학이면 지역 사회의 소외계층의 아이들까지 돌봐온 그녀. 12월 추운 겨울 대전역 근처 카페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는 맑은 눈을 가진 그녀를 만나보았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부족한 게 너무 많은 데 저를 인터뷰하려고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전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있던 그녀는 대전에 오면 한 번은 꼭 먹어봐야 하는 거라며 따뜻한 빵을 한가득 건넸다. 눈이 내린 대전은 꽤 추웠지만, 아주 작은 것부터 상대방을 위하는 그녀의 따뜻한 배려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 내내 마음이 참 훈훈했다.

 

 

작은 사랑의 실천

 

  ‘새해엔 부자 되세요.’ 우리가 친숙하게 건네는 새해 인사말은 우리들의 새해 목표가 돈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 지 씁쓸하게 한다. 스무 살밖에 안된 그녀가 공감의 기부회원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에는 으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부모님 용돈으로 기부를 하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달 전달되는 기부금이 그녀가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것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커피 한두 잔 마실 돈 아끼면 훨씬 소중한 곳에 쓰일 수 있는 걸요. “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기부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다.

 

  공감에 정기 기부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지역사회 아이들의 학습지도를 해오고 있다는 그녀. “여름방학 때엔 지역 아동의 학습 봉사를 하는 여름 행사에 참석을 했어요. 처음엔 여느 초등학생 아이들처럼 아이들은 저에게 공부하기 싫다고 떼를 써서 저도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나 답답했어요.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한창 놀고 싶을 때인데, 길지도 않은 여름방학에 또 학습 행사라니. 제가 생각해도 너무 답답할 거 같더라고요. 학교에 또 나와서 공부하는 것도 스트레스일 거라는 생각에 공부만 억지로 시키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했어요. 행사 마지막 날엔 아이들이 칠판에 ‘사랑해요‘라는 말과 함께 헤어지기 섭섭했는지 울면서 풍선에 편지까지 적어 건네는데, 아쉽기도 하고 참 뿌듯해서 계속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스무 살 그녀, 인권 변호사를 꿈꾸다

 

  기부에 봉사활동까지. 이 ‘바른생활 소녀’의 꿈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저는 조영래 변호사처럼, 우리 사회에 힘없는 많은 사람에 든든한 가족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뉴스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사회의 수많은 소외된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꿈꾸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노력해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스무 살 새내기 대학생이 인권 변호사가 꿈이라니. 공감에서 자원 활동가로 일하며 어느덧 4개월 동안 직접 바라본 공감의 변호사들은 무엇보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들이었고,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농성장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는 것부터 아파트 경비원분들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또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의 인권까지, 끊임없이 현실의 너무나 커다란 벽과 싸우는 인권 변호사들. 혹시 그녀가 인권변호사에 대한 이상만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변호사를 꿈꾸었다는 그녀는 고등학생이 되며 법원에서 봉사를 시작으로 고등학교 3학년에는 공감 청소년 행사에 참석하여서 그리고 공감 윤지영 변호사를 만나며 인권 변호사의 꿈을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렴풋이 뉴스를 통해 들려오던 사회 문제와 조영래 변호사님을 통해 인권 변호사에 대한 동경이 공감 청소년 행사를 통해 공익 인권변호사가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어요. 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이 사회에 소외된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 사회에 가장 개선했으면 하는 인권 문제에 대해 묻자, 그녀는 뜻 밖에도 노인들의 복지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경비 아저씨를 해고할 지를 결정하는 설문조사가 있었어요. 그 설문조사를 보며, 얼마 전 목숨을 끊으신 경비 아저씨의 사건이 생각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한 가구에서 겨우 한 달에 1, 2만원, 하루 커피 한 잔만 줄여도 충분히 납부할 수 있는 돈인데 그 돈 때문에 오랫동안 아파트에서 고생하신 아저씨를 해고해야 할지 결정한다는 게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경비 아저씨도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 소중한 사람인데 돈 얼마 때문에 한 사람의 직장을 잃게 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그녀는 말한다. ‘우리’의 영역을 넓혀, 아파트 경비 아저씨도,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 그리고 캠퍼스에서 마주치는 청소부 아주머니까지 우리로, 가족처럼 생각하고 배려해보면 어떨까라고.

 

 

공감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 

 

  공감의 청소년 인권 행사를 통해 인권 변호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더욱 궁금해진 그녀는 행사 후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를 찾아가 삼십 개가 넘는 질문을 하며 괴롭혔다며 쑥스럽게 말했다. “윤지영 변호사님이 말씀하시길 인권이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힘들 수도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을 지라도 끊임없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노력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신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윤지영 변호사님이 맡으셨던 다양한 사건을 들으며, 우리나라에서 아직 많은 분야의 인권이 취약하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직접 그녀가 꿈꾸는 인권 변호사를 만나 수많은 질문과 답변 속에서, 인권 변호사의 삶의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자신의 꿈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제가 과연 잘 견딜 수 있을지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았어요. 하지만 몇 번을 되물어 보아도 제가 살고 싶은 삶과 저의 가치관, 저의 꿈이 우리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기에 제 진로에 대해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꼭 인권 변호사가 되어 이 사회의 많은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고 싶어요.”

 

  변호사가 되어 우리 사회의 이웃들이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주는 사회를 꿈꾼다는 그녀. 소외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 무관심이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그리고 배려로 가득 찬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녀의 꿈. 벌써부터 그 맑은 눈빛을 반짝이며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변화시킬 제 2의 조영래 변호사가 되어있을 그녀의 모습이 기대된다.

 

글 _ 박효민 (20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