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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나이」와 도시의 반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말은 당차지만, 정작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돈도 ‘가오’도 사라져버린다. 한 대통령후보의 유튜브 방송으로 새삼 유명해진 윤흥길의 단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는 이런 오갈 데 없는 민초의 아픔을 애잔한 동지애의 마음으로 그려낸다.

 

이 소설의 배경은 두 가지다. 어려운 생활환경에 거의 불량배로 살다 문득 깨우쳐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던 작가의 경험과, 1970년대 개발독재의 탐욕에 침탈당한 삶의 터전을 되찾고자 하였던 광주대단지 사건이 그것이다.

 

작중화자 오 선생이 교사로 근무하며 어렵사리 마련한 집 문간방에 보증금도 완불하지 않고 계약일보다 사흘이나 앞서 이사 온 권 씨는 경찰의 요주의 관찰대상자다. 세 식구 살림이라고는 이불 몇 조각과 부인이 들고 온 취사도구가 전부다. 그래도 필요할 때마다 “이래봬도 나는 안동 권 씨요” 라든가 “이래봬도 나도 대학을 나왔소”라고 내뱉는 권씨는, 공들여 거울처럼 광택을 낸 10켤레를 번갈아 신고 다닌다. 하지만, 그의 구두가 내뿜는 광택이 그의 돈 없음을 가리지 못하듯, 그가 안동 권 씨에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또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이 가지는 권력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는 국가에 의하여 전과자로 내몰린 반역아 이자 바로 그로 인하여 경제적 실패를 강요당한 실직자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폭압체제가 본격화되는 1971년, 최초의 도시빈민 항거사건으로 기록되는 광주대단지사건은 정부의 수탈적인 개발정책의 산물이었다. 청계천 등 서울도심지역의 빈민촌을 허물고, 이중 곡가제와 같은 반농업적 산업화정책의 여파로 급증하였던 이농민들과 한국전쟁 피난민이 대부분이었던 거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곳이 경기도 광주대단지였다. 정부는 이들이 내쫓긴 대지를 기업이나 자본가에게 분양하여 이문을 남기고, 불모지였던 광주대단지지역을 이 철거민들 혹은 그 전매인에게 불하함으로써 또 이문을 남기고, 나아가 이 대단지가 개발되면 그로부터도 ‘또또’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알량한 돈 계산을 한 것이다.

 

가구당 20평, 평당 2천원에 3년 분할상환 조건인 이 택지는 비록 천막 하나만 뎅그런 나대지였을 뿐이지만, 집 한 채가 일생의 꿈이었던 도시빈민들에게는 “아침저녁으로 한 뼘 한 뼘 애무하다시피 재고 밟고 하느라고” 만사를 잊을 지경이었고 “당시의 나에게는 이 세상 전체가 끽해야 이십 평에서 그렇게 많이 벗어나게 커 보이지는 않았”을 정도였다. 물론 거기에는 전태일 열사의 집도 있었고, 겨우 변통한 이십만 원으로 철거민의 입주권을 전매한 저 ‘가오’ 잡는 안동 권 씨의 집도 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 그리 만만하랴. 관료들의 한탕주의가 횡행하던 군사정권의 시절은 더더욱…. 총 35만평에 15만 명을 받아들인 이 대단지는, 그러나 하수도와 같은 도시기반시설은 물론, 생계수단인 서울로의 통근버스조차도 제대로 배치되지 않았고 단지 내의 생업 수단도 구비되지 못하여 또 다른 집단빈민촌-게토-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국회의원 선거 바로 다음 날, 보름 안에 집을 짓지 않으면 불하를 취소한다는 불호령이 떨어졌고, 어찌어찌 날림으로 집을 짓고 한숨 돌리려는 순간 전매입주자는 지가를 평당 8천원 내지 1만 6천원으로 계산하여(당시 주민들은 “백 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폭리 말라”고 외쳤다) 보름 내에 일시불로 납부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설상가상으로 토지취득세납부통지서까지 발부된다) 입주민들의 집단저항은 불 보듯 뻔한 일이 되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인텔리 권 씨는 어찌하다 방관자에서 폭동 주동자로 휩쓸려 체포되고(실제 22명이 구속되어 2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교도소를 거쳐 셋방살이 실직자가 되어야 했고, 아내의 출산비용을 위해 집주인 오 선생의 방에 들어가 강도 행각을 벌이다 ‘가오’마저 잃어버린 채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기고 사라져야 했다.

 

사건 후 3년이 지나면서 이 지역은 성남시로 승격하였고 2021. 3. 성남시는 이 사건을 「8·10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으로 이름 지었다. 하지만, 이름뿐, 3만 명에서 6만 명 정도가 참여한 이 ‘민권운동’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토지는 재산이었을 뿐 하시라도 생활의 터전이 되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인식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권리여야 할 주거권은 언제나 이윤목적의 재산권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게는 1983년 상계동·목동의 철거민들에게 약속된 공영아파트가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 경비를 대기 위한 이윤 목적의 아파트로 바뀌면서 그들은 길거리 투쟁으로 내몰려야 했고, 가깝게는 2009년 용산의 상인들이 그 생업의 터전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 혹은 대장동 사건에서처럼 삶의 공간이 투기와 협잡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돈 놓고 돈 먹는 야바위판을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윤흥길의 이 소설조차도 그 천박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광주대단지 사건의 피해자는 애초 서울지역에서 내쫓겨 그곳으로 강제전입 당한 철거민 즉 도시하층민들과, 그래도 직업께나 가지고 생업을 꾸려나갈 수 있는 중산층으로 이 철거민의 입주권 딱지를 사들어 이주한 전매 입주민 두 부류였다. 하지만 작가의 눈에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우선한다. 사실 저 민권운동에서의 “민권”은 전자에게는 생존과 생계에 대한 투쟁이었으나 권 씨와 같은 후자에게는 재산권 투쟁의 성격이 더 강하였다. 권 씨가 처음에는 투쟁대열을 피하여 택시로 서울로 도망치다가 투쟁대에 되잡히고 그 와중에 경찰의 폭력에 흥분하여 최전선의 선봉대가 되었던 것도 이런 계급적 간극을 잘 보여준다. 그 소설에서조차 도시하층민들은 지식인 오 선생의 생활방식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이방인이 되거나, 혹은 오 선생의 아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개돼지처럼 받아먹는 비굴한 아이들이 되어 가시권 바깥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성남에서 성장과정과 정치경력의 대부분을 구성한 대선 후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이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를 지목한 것은 그래서 내심 아쉽다. 광주대단지의 20평 택지 위에 도시중산층의 꿈을 담아보려다 실패한 사나이가 남긴 아홉 켤레 구두는 잃어버린 그의 돈과 ‘가오’를 되비춘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전쟁과 산업화로 본향(本鄕)을 빼앗기고, 어렵사리 정착한 빈민촌 판잣집도 개발정책에 강탈당하고, 급기야 허허벌판 한 복판에서 초근목피로 살아야 했던 바로 그 천막집조차도 기어코 빼앗겨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었다. 아홉 켤레의 구두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그래서 이리 몰리고 저리 쫓겨야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선거판의 주류 공약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가져다주는 시절이 있었다. 농노들과 같이 자신의 토지를 갖지 못하여 오히려 토지에 얽매여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비로소 그 예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도시가 추구했던 자본제적 사유재산의 논리가 다시금 그 도시민들을 옥죄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아예 그 자유 속에 도시빈민의 몫을 소거해 버렸던 우리의 과오 탓일까? 데이비스 하비가 “모든 도시 혁신은 잉여를 생산하는 조건은 물론 생산된 잉여의 이용을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단일목표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도시의 반란을 꿈꾸었을 때, 그리고 그가 사숙한 르페르브가 우리 시대의 혁명은 도시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중심에는 아홉 켤레의 구두가 내뿜는 광택에 가려져 투명인간이 되기를 강요당했던 이들이 자리한다. 도시는 그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홉 켤레의 구두를 남긴 사나이」는 덮어야 할 때다. 어쩌면 「힐튼호텔 옆 쪽방 촌 이야기」(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편)부터 우리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_한상희(공감 이사, 건국대 법전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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