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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안마사에 대한 헌법재판소결정을 보며_한상희 건국대 법과대학 교수

 

공감칼럼


헌재는 정책법원이 될 수 없나?


한상희_건국대 법과대학 교수


  탄핵심판, 행정수도위헌결정 등등 사법과 정치의 경계를 스스럼없이 넘나들던 헌법재판소가 또 한 번 대형사고를 저질렀다. 헌법재판소는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 혹은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하등의 성찰의 흔적도 없이 기존의 법논리를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결정문으로 찍어내는 한갓 법기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대법원은 정책법원 운운하면서 스스로를 헌법재판소보다도 우월한 최고의 국가기관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무진 애를 쓰고 있는데,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 고리타분한 법도그마의 외각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주어진 판례나 반복하는 고등법원상고부 정도의 위상으로 퇴행하고자 작정한 것일까?

  1920-30년대의 미국 연방대법원은 계약자유와 사소유권의 절대라는 형식적 법담론에 함몰되었다가 뉴딜정책을 추구하는 정치권의 거센 도전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의 법원장악 음모에 휘말려 들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시대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연방대법원의 고리타분한 경직성이 스스로의 정당성뿐 아니라 국민으로부터의 신뢰까지도 상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의 자격을 부여하는 현행 의료법체제를 위헌선언한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직업의 자유에 대한 독일의 그 휘황찬란한 3단계론에 함몰된 채 장애인 보호라는 실체적 정의에 입각한 헌법의 요청에 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국민의 편에서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여야 하는 헌법재판기관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심각한 회의를 자초하였다.

  대저 안마사의 자격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말하듯 단순한 직업의 개념 속에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제 이래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하나의 적극적 우대의 관념 속에서 그들의 생계와 생활의 보장장치로서 제도설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안마사자격은 사회제도로서 혹은 의료법체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 왔음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이 수행하던 안마라는 서비스를 일제가 직업이라는 근대적 형식을 부여하였고, 이렇게 사실상 시각장애인들이 ‘독점’하던 안마사의 자격은 장구한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의 관습 내지는 관습법으로서 우리 법체계에 포섭되었다. 그리고 1972년 박정희정권에 의하여 그것은 실정법의 형식을 획득하여 명문화되었고 그 명문화되는 과정에서 안마라는 서비스와 가장 근접한 법률인 의료법에 포함되게 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런 당연한 문제를 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 물리치료사의 경우에는 아무런 객관적 진입제한을 하지 않으면서 굳이 별도의 조문을 두어 같은 류의 (의료)서비스영역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는 안마사제도를 만들어 두고 그 자격을 시각장애인에게만 한정하는 그 이유 자체를 쳐다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제 현행 의료법 체계만 가지고 보더라도 안마사제도는 일종의 체계부조화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즉, 안마가 (준)의료행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료기사와 관련한 규정으로 처리했어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별도의 법에서 처리했어야 했다.

  사정이 그럼에도 현행법은 이를 의료법에 수용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마디로, 안마사제도는 일정한 의료행위 혹은 서비스를 전제로 하고 그에 대하여 일정한 자격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그러한 것을 업으로 삼아 왔던 시각장애인들에 대하여 하나의 특례를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유사의료행위이기 때문에 의료법에서 정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별도의 단행법으로 정하기 어려운 안마라는 서비스행위를 의료법이라는 형식을 빌어 자격화하고 이를 시각장애인에게 독점적으로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입법사적 배경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처럼 안마사제도가 비시각장애인의 직업의 자유를 제한한 것인지 혹은 그 입법위임의 체계가 포괄적 위임인지의 여부를 살펴보아야 한다. 관습법의 형태로 떠돌던 안마사자격제도를 실정법의 영역으로 편입하게 되는 과정이나 그 취지를 먼저 살펴보면서 그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직업의 자유에 대한 예의 그 3단계론이 가지는 이론적 의미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헌법재판소가 이 3단계론이 전혀 적용될 수 없는 영역에다가 무리하게 적용시켰다는 점에 있다. 안마사자격의 제한제도는 그 본질에 있어 직업의 자유에 관한 제한이 아니라 제도의 초기에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특례적 시혜였고 후기에는 안마를 시각장애인의 고유업종으로 인식하고 있던 관습법을 실정법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의료법은 이 부분에 관한 한 물리치료사라는 직역과 안마사라는 직역을 분리시켜 놓았고, 전자는 까다로운 고등교육과정과 훈련과정을 이수하도록 하면서 모든 이에게 개방시켜 놓은 반면, 후자는 중등교육과정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과정을 거치되 그 자격을 시각장애인에게만 한정시켜 놓는 이원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 의료법의 체계상 안마사제도는 물리치료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기사에 대한 예외적·특별법적 규정으로 형성되었고 이 점에서 그것은 기존의 관습법을 재확인한 하나의 특례규정이 되어 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가 굳이 이 부분에 대한 헌법적 판단을 하고자 하였다면 그것은 그 3단계론의 형식적 기준들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에게 이런 특례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혹은 일반인의 법감정에 비추어 합리적인 것인지, 또는 그것이 장애인의 보호라고 하는 헌법적 요청에 비추어 비용-편익분석에 부합하는 정책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인지에 집중하였어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헌법재판소는 판단의 준거 자체를 혼돈함으로써 입법의 취지 자체를 몰각하였을 뿐 아니라 장애인의 보호를 향한 우리 헌법의 명령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셈이 되었다. 더 나아가 최고의 사법기관이자 헌법재판기관으로서 일반국민들의 정의감정과 법감정을 유효하게 법의 영역으로 포섭시킬 수 있어야 하는 헌법재판소가 스스로 국민들의 의식과 괴리되는, 그럼으로써 국민적 신뢰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결과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실제 인권을 보장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 첫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가슴 아파 할 수 있는 인권감수성이며, 그 둘째는 이러한 공감을 법적 주장으로 가공해 낼 수 있는 인권법능력이다. 더구나 그 다른 사람이 항시적이고 집단적으로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는 소수자나 장애인인 경우에는 보다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요청된다. 실제 장애인의 인권과 그 생활-논자에 따라서는 이를 “복지”라 이름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의 보장은 헌법이론에서 제기하는 각종의 법리만을 단순적용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에 가해지고 있는 차별은 다른 차별의 경우처럼 그들을 장애인이라는 소수자집단으로 구획하고 그 경계를 따라 배척하고 배제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그들의 장애로부터 야기되는 생산능력의 저하 즉 저생산성 자체가 또 다른 차별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시각장애인의 경우 고용차별을 없애고 취업시킨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불편없이 일할 수 있도록 확대경을 따로 설치하거나 혹은 음성전환장치를 마련하거나 혹은 점자시설을 해야 한다. 일종의 “편의제공조치”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차별과 억압의 요소는 잔존한다. 그들은 바로 그러한 보조장치의 사용으로 인하여 혹은 장애 그 자체로 인하여 작업장에서의 생산성이 다른 노동자들에 비하여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작업장의 모든 시설과 기계와 작업환경들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형성되었고 또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생산성이데올로기 자체가 최대의 효율을 지향하면서 노동기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산성의 저하는 그 자체 차별의 낙인으로 횡행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장애인의 경우에는 기존의 법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차라리 차별 그 자체와 다름 아니게 된다. 형식적 법담론을 기계적으로 “평등하게” 적용하였다고 해서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평등”의 주장 아래에서 차별은 은폐·엄폐되고 잠복하며 오히려 보다 정교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해소는 비장애인과는 다른 기준과 다른 법리와 다른 규율을 적용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의료법상의 안마사제도는 비록 그것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져 전근대적인-제도설계상으로 그리 매끄럽지 못 하다는 의미에서-인상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른’ 기준에 의하여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해소정책으로 손꼽을 만한 제도이다. 시각장애인인 그들을 비장애인들과 기계적으로 평등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과는 다른 어떠한 직업의 영역을 확보해 주고 이로써 시각장애인들의 삶과 생활과 복지를 동시에 도모하는, 일종의 ‘달리 취급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하게’ 되는 제도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난히 평등의식이 강한 우리 국민들도 이 부분에 대하여 약 100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일로 수용해 오기조차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본성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달리 취급함’을 거부하고 오로지 기계적인 평등만을 주장하였다. 대학에서 시각장애인 학생을 위한 점자시설을 갖추느라 예산을 할당하는 것에 대하여 비시각장애인 학생이 그것을 평등원칙 위반이라 주장하는 것에 손을 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재판소는 달리 유사직종으로 나아갈 길이 열려 있는 청구인들과 시각장애인에게 동등한 정도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고 이 명제를 통해 현행 안마사자격제도를 위헌이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부 재판관은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자격을 독점시키지 않고 개방하여 안마업의 경쟁체제가 이루어지더라도 시각장애인의 취업기회확대 혹은 자격시험과목의 면제 등의 ‘편의적’ 조치들을 취하면 되지 않느냐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제도, 그나마도 헌법재판소의 이 결정에서 취하고 있는 논거를 적용한다면 또다시 위헌의 의심이 풍겨나는 제도들을 예상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보다 덜 제한적인 대안(LRA)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바로 그런 대안이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안마사의 자격제한제도가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안마와 같은 직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비시각장애인들에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대안들-안마사가 아니라 물리치료사 혹은 스포츠마사지사, 지압사 등등 다양한 직업영역들을 제안하고자 하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라는 점이다. 정말 헌법재판관들은 왜 비장애인들이 손쉽게 내세우는 어떠한 주장이 경우에 따라서는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와 생활을 본질적으로 침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는 장애인들의 권익과 비장애인들의 권익이 더러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할 때, 일견 완벽해 보이는 헌법이론적 근거를 가지는 비장애인이 아니라 부실하지만 자신들의 생활과 삶을 매달고 있는 장애인이 그 권익을 양보하여야 한다고 진실로 믿고 있을까?

오랜 기간 동안 권위주의적 통치를 겪으면서 인권감수성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 했던 우리의 법조문화가, 윤리의 문제를 법리의 문제로 대치하고 평등의 문제를 획일의 문제로 오독하며 배려의 문제를 시혜의 문제로 왜곡하는 오늘의 사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혹자는 프로이센왕국에서의 입헌주의는 외견적·형식적 입헌주의라 폄하하고 있지만, 법률관료주의의 틀에 젖어 경직된 법판단으로만 일관하는, 일종의 법기계가 되어 버린 우리의 헌법재판소는 무어라 이름지어야 할까? 그나저나 졸지에 삶과 생활과 생계를 빼앗겨 버린 이 땅의 시각장애인들은 오늘도 노상에서 마냥 울부짓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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