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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비밀정보기관이 사라진 세계는 불가능한가? – 이계수/건국대 법과대학 교수

공감칼럼

이주노동자, 테러리스트, 그리고 국가정보원 – 비밀정보기관이 사라진 세계는 불가능한가?

이계수 – 건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공감소식지에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자 독일에서 두 딸 아이의 ‘평범한’ 아버지로 살아가고 계시는 서준식 선생이 예전에 썼던 글이 문득 생각났다. 1997년 4월의 어느 날 ‘인권하루소식지’에 “이렇게 멋있는 안기부!”라는 제목으로 실린 그 글에서, 서준식 당시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는 즐거운 꿈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공안정보기구 개혁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서의 발제와 토론을 듣다가 깜박 잠든 사이 그가 꾼 백일몽(白日夢)에 그의 딸은 안기부 직원으로 나타나 안기부의 여기저기를 보여주며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그 멋진 안기부’를 아버지에게 소개하고 있다. 1996년 말 날치기 통과된 안기부법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논란이 많았던 시기였던 만큼 서 선생으로서는 그런 멋있는 안기부를 그려 볼만도 하셨을 것이다.그로부터 8년. 나는 비밀정보기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렇게 멋있는 신세계!”를 꿈꾸어본다.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고 국민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비밀정보기관은 민주주의적 의사형성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비밀정보기관은 두 가지의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사회구조에 위협이 된다.

첫째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활동방식으로 인한 위협이다. 정보기관의의 비밀스러운 활동방식은 자신들의 특별한 권한을 정치적 반대세력의 감시를 위해 사용할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자신의 행동이 비밀정보기관에 의해 항상 기록되고, 정보로서 계속 저장?사용?배포되지 않을까 근심 걱정하는 이는 쉽사리 정치적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감시와 박해, 불이익이 두려워 정치활동을 단념하는 시민들이 많아질수록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위한 조건들은 의심스러운 상황에 빠지고 만다.

둘째는 비밀정보기관들이 그들의 존재이유증명을 위해 부각시킨 상투적인 적들과 이들 상투적 적에 대한 적대감이 가져오는 위협이다. 상투적인 적을 상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초조와 불안감, 어떤 정형화된 분노를 가슴에 품고 산다. 상투적인 적의 존재로 인한 초조감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권력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감시와 통제의 강화를 커다란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비밀정보기관이 민주주의 사회에 가하는 이러한 위협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구들이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그 세력을 키워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밀정보기관의 조직과 운영은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관념이 정치권은 물론이고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도 비밀정보기관 개혁 논의에는 여러 번 참여하였으나 비밀정보기관 자체의 폐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못했다. 정보기관 자체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에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제기된 바 없다는 사실,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도 정보기관 자체의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한 때 있었으나 현실정치를 고려한 논리들 앞에서 ‘정보기관 자체의 완전폐지론’은 힘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이 부분에 관한 한 나 스스로도 자기검열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주장에 대해 가해질 비판과 비난 – 한반도의 안보환경과 현실을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의 잠꼬대 같은 소리 – 을 견뎌낼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세계 정보기관의 역사와 현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것이 제국주의적 침략?(신)식민지 경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고(폴 토드, 조너선 블로흐 저/이주영 옮김, 『조작된 공포: 세계 정보기관의 진실』을 한번 읽어보라), 외국인 특히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 ‘범죄자’로 분류하고 감시하는 정보기관의 활동을 통해 국가안보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일까 반문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차츰 다음과 같은 단순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한 국가 차원에서의 비밀정보기관 폐지논의는 결국 ‘국가안보’라는 논리에 막혀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단위는 지역(예컨대 동아시아 지역), 대륙(예컨대 유럽연합) 나아가 전 세계가 되어야 한다. 시민단체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비밀정보기관의 폐해를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제기하고, 그 폐해를 제거하는 방편으로 비밀정보기관의 폐지를 글로벌한 차원에서 얘기해야 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정보기관간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거의 구축된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정보기관 폐지를 글로벌한 차원에서 얘기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한국의 시민인권운동진영에서부터 ‘비밀정보기관 없는 세상을 위한 전 세계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는 2006년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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