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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만나고 싶었습니다- 여성학자 정희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인권은 경합적인 가치이지, 배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이 장안의 화제다. 이 책은 여성학자 정희진 씨가〈한겨레〉, 〈IF〉,〈당대비평〉등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묶어 펴낸 것이다. 책의 곳곳에서 정희진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와 넘치는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최근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학자 정희진 씨를 만나 여성주의, 인권, 국제결혼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Q. 선생님이 최근에 쓰신『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사회 일상의 성 정치학』을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여성주의는 무엇이며,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제는 다른 사회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 여성주의는 다른 사상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세계관, 지식, 교양, 정치적 입장이지요. 무엇이 여성주의냐 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왜 여성주의를 정의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니까요. 정의하는 것은 권력 행위지요. 흑인, 장애인, 노인, 레즈비언, 가난한 여성들이 정의하는 여성주의는 기존의 여성주의와 갈등할 것입니다. 이처럼 여성주의는 여성들 내부에서도 경합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자’는 저를 구성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제 자신의 경험과 고통에 대해 굉장한 설명력을 준다는 점에서, 저를 끊임없이 정치적인 인간이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성별(gender)은 사회를 조직하는 기본 원리이고, 성차별은 모든 지배-피지배 관계의 관례(model)를 제공하지요. 그래서 여성주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주의는 우리를 다른(alternative) 세계로 안내하지요. 여성주의는 기존 서구 남성 중심 관점의 모순과 딜레마를 돌파하는 사유 방식이기 때문에, 자기 성장과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Q. 농촌 지역 국제결혼이 1/4을 넘고 국제결혼 10%시대를 맞이하는 한국사회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주여성은 여성인 동시에 외국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 지위가 매우 열악합니다. 국제결혼 시대를 맞아 한국사회에 당부하고 싶으신 바가 있다면?

– 일단, 제가 한국사회에 무엇인가를 ‘당부’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웃음). 우리사회의 국제결혼은 기본적으로 계급문제입니다. ‘농촌 총각 문제’는 남성들 간의 계급 갈등이 남성과 여성의 문제로 치환된 것입니다. 가부장제 특성 중 하나는, 여성이 동산(動産)으로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낭만적 사랑에서부터 인신매매(우편주문신부, 성매매…)까지 그 성격이 다양합니다. 문제는, 각각의 양극은 반대가 아니라 연속선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지요. 어쨌든, 국가 간 경제 격차가 있을 때,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은 부자 나라 남성들에게 ‘판매’되지요.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여성들은 국내로 ‘들어오고’ 한국여성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나갑니다’. 우리사회에서 농촌 남성은 같은 조건의 여성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 간 빈부 격차가 여성의 이주로 연결됩니다. 남녀 간 성별 권력 관계는 국가 간 권력 관계를 매개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기원’, ‘본질’, ‘순종’을 강조하는 사회인데, 이는 남성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이민국가입니다. 저는 우리사회가 국제결혼을 “다양한 것은 강하다”라는 관점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어느 사회, 조직이나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출신들이 모인 조직일수록 건강합니다. 이주 여성과 ‘우리’의 차이가, 이질성이 아니라 다양성이 주는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수용되었으면 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성별, 인종, 계급 등의 범주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기준의 상대성을 강조하십니다. 반면, 법학은 보편적 기준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횡단의 정치’가 보편성을 중시하는 법학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상대성이라기보다 맥락성이지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어떤 시대에서 여성성이 다른 시대에서는 남성성일 수 있고, 어떤 사회의 부자가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지요. 한 마디로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객관적, 중립적 지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낡은 것이 되는 경험을 매일 매일 하고 있지 않나요?

모든 법학이 보편적 기준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법학에서만 그렇겠지요. 여성주의 법학이나 탈식민주의 법학, 탈근대 법학에서는 더 이상 기존의 보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근대적 법학 체계가 얼마나 도전받고 있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보편주의와 자유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유용하고, 또, 희망적이지요. 보편성을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여전히 진보적 가치입니다. 문제는 이때 보편의 기준을 누가 설정하는가? 입니다. 이제까지는 강자의 주관성이 보편성으로 미화되어 왔습니다. 보편의 반대말은 특수가 아니라 차이입니다. 여성주의는 보편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해체, 재구성된다고 주장하지요.

Q. 오랫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피해 여성들이 ‘남편 살해죄’를 저지른 경우 현행법상 고의가 있는 살인으로 간주됩니다. 근본적으로 가정폭력 사례에서 여성 피해자에 대한 인식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가정폭력 뿐 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gender), 성(sexuality) 관련법은 사문화된 것이 많습니다. 법률적으로는 불법이지만, 문화적으로나 일상적으로 다 하고 있죠.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성매매 같은 인권 침해가 아니더라도 낙태, 간통 등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젠더 관련법은 사회적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법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법이 있으니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착각하기 쉽지요.

가정폭력의 경우 남성이 여성을 구타하다 피해자가 죽으면 과실치사지만, 여성이 정당방위 차원에서 가해남성을 죽이면 살인이 됩니다. 성역할에 대한 문화적 고정 관념이 법적용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남성은 원래 폭력적이라는 인식 때문에, 타인을 열 대를 때려야 폭력이라고 본다면, 여성은 남을 한 대만 때려도 고의적, 계획적으로 인식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성의 폭력은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는 등 쉽게 용인하지만, 여성에게는 남성보다 훨씬 더 참을 것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가해 남편에게 정당방위를 행사한 여성은 이러한 사회적 기대를 저버린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지요. 여성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없습니다. 법 역시 일종의 담론으로,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법도 결국은 누군가의 경험이지요.

Q.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고 난 후, 성 판매 여성들이 생존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 노동자’로서 성 판매 여성의 지위는, 여성주의 진영의 성매매 입장과는 다릅니다. 최근 성매매와 관련된 사례 중에, 업주에게 성 판매 여성에 대한 급여 지급 의무가 있음을 들어 승소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처럼 실제 사례에서는 성 판매 여성의 지위를 성노동자로 보는 것이, 성 판매 여성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모든 사랑과 섹스는 노동입니다. 감정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노동이지요. 성매매는 수 천 년 동안 남성들이 이 노동을 안 해도 되도록 제도화 한 것입니다.

“사랑과 성은 노동이다”는 말이, “여성은 성 노동자여야 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성 노동자일 수 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여성은 성 노동자다”를 인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질문 방식을 달리 했으면 합니다. 여성이 성 노동자냐 아니냐는 질문보다, 더 본질적인 중요한 질문은, “왜 언제나 파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가 아닐까요? 성매매는 남성과 여성의 계급 차이와 여성과 여성간의 계급차이가 복잡하게 맞물린 문제입니다. 기존의 상식과 인식론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사회의 反성매매 담론이, 성별 이해관계, 즉 여성인권 문제가 아니라 “상품화는 나쁘다”, “도덕적으로 문제다”는 식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저는 상품화가 문제라기보다는, ‘상품의 고객’이 누구인가, 그리고, 도대체 우리사회의 어떤 권력이 그들에게 고객이 될 권리를 주었는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인권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공감”의 지향도 우리 사회의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이를 개선해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인권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공감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민주주의란, 인권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을 넘어, 인권이 인간의 권리라고 했을 때, “누가 인간인가?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를 질문하자는 것입니다. 인권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인간의 권리’ 그 기준에 도전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확장과 더불어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인권은 배려입니다”라는 슬로건은 문제적이라고 봅니다. 누가 누구를 배려한다는 것입니까? 인권은 경합적인 가치이지, 배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배려해야 합니까? 여성이 남성을 배려해야 하나요? 흑인이 백인을 배려해야 하나요? 배려라는 말에는 이미 주체와 타자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공감과 아름다운재단은 우리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GO와 NGOs PO와 NPOs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지요. 조직의 고정된 개념을 해체하고 횡단하는 획기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거버넌스의 좋은 예이지요. 또한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제기하는 조직이라고 봅니다. 공감과 아름다운 재단은 전문가에 대한 일종의 역할 모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운동가이지 않은 전문가, 전문가가 아닌 운동가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Q. 선생님께서는, “여성주의는 우리는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고,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책에 쓰셨습니다. 남자들의 말 한마디에 발끈하며, 한편으론 굳이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라고 혼란스러워 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지요?

– 양궁 선수는 활시위를 당기고 쏘는 매 순간 엄청 긴장하잖아요? 삶에서 긴장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즐기고 자원으로 삼을 수밖에요. 여성이든 한국인이든 노동자든,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좌절과 고통을 경험하잖아요?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페미니즘을 알게 되어 일상이 괴롭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라고 말하는 남성과 여성들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무지이지 앎이 아닙니다. 모든 앎은 해방의 가능성입니다. 성희롱을 모르고 당할 때와 알고 당할 때는 대응 방식도 달라질 뿐 아니라, 알고 당하면 훨씬 덜 상처받게 됩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저항’을 ‘선동’하지 않습니다. 주체로서 세상과 협상하라는 것이지요. 협상하려면 자기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자기를 못 살게 구는 세상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꼼짝없이 억압당하지만,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언어가 있으면 그때부터는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게 되지요.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아니,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을 스스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행위자가 되라고 조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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