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연대의 세계화를 꿈꾸는 사람들 -“경계를 넘어”

쉼표하나

연대의 세계화를 꿈꾸는 사람들
“경계를 넘어(Imagination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지은 (경계를 넘어)

내가 쓴 원고 좀 한 번 읽어 봐. 이번 주 세계 뉴스는 네팔 소식이 들어가는 군. 어, 아프간에서 전화 인터뷰 할 분 아직 연결이 안 되고 있어. 이제 녹음 들어가면 돼? 잠깐, 담배 하나 피우고 시작하자. 맞다, 첫 곡 소개 하는 걸 깜빡 했네…….

매주 토요일 오후, 불과 네댓 명이서 동 방송국 8층을 이런 식으로 한 바탕 어지럽히고 만다. 어렵사리 녹음을 끝냄과 동시에 아까의 소란도 가라앉으면, 다음으로 우리는 영등포 시장 안 할매가 말아주시는 국수를 먹으러 나선다. 다시 오늘 라디오 녹음은 어땠다며 왁자지껄 떠들면서.

그러고 난 다음 주 화요일에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말끔히 정리된 우리의 목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안녕하세요, 민족을 넘어 국경을 넘어 성과 종교를 넘어 연대의 세계화를 꿈꾸는 사람들, ‘경계를 넘어’, 저는 진행을 맡은 최**입니다.”라는 시작과 함께 귀에 익숙한 인터내셔널가 시그널이 나오고, 그럼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비실비실 번져나간다. 어설픈 모양새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생각과 표현으로 정성스레 빚어진 질그릇 소리 같다.

‘경계를 넘어’는 경계를 허물자는 의미.

‘경계를 넘어’가 제법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우리를 국제적인 문제와 이슈에 관심 갖는 이들의 모임으로써 ‘경계를 넘어’라고 지칭한다. 생경한 느낌으로 무슨 일들을 하나 호기심에 찬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어떤 분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만 활동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는 오해에 가까운 질문도 하셨다. 국제연대에 대한 보통의 인식이 아직도 추상적 수준에 그친다는 반증으로 보여졌다.

일원으로써 ‘경계를 넘어’라는 이 말에서 드는 개인적인 생각은, 단지 지리적 확장을 내포한 의미 보다는 일종의 운동적 사유가 녹아든 대항 주제들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더 들어맞는 표현이라는 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에 갇혀있었고 넘어야 할 장애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지금도 유효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뿌리 깊이 내재된 민족과 국가 중심의 가치관은 기어코 우리 삶의 방식까지 철저히 지배해 왔다. 애국, 민족수호 정신 등이 추앙받는 면에서는 좌, 우를 막론하고 고유한 정치적 단일함으로 차렷 경례였다.

‘우리’라는 것에 치우친 사고방식은 매몰된 일방주의와 군사주의적 질서를 낳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통념과 구분에 의해 또 하나의 ‘-이즘’으로 무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성립된 세계관은 매우 왜곡되어지고 전형적으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폭력들로 표출된다. 상대를 경쟁자 혹은 착취적 산물로써만 인식하여, 뺏거나 빼앗기거나와 같은 이분법적 결론 도출로 귀결시키는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의 짓이겨진 모습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국가, 민족, 종교, 성, 계급, 문화 등의 잣대아래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는 편견 없는 동질성을 차단시키는 장벽을 세웠던 건 아닌지 엄밀히 살펴봐야 한다.

가령 낯선 지역, 카슈미르에서는 지난 대지진으로 인해 아직도 수만 명이 텐트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원지대의 강추위로 인한 사망자가 계속해서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생존 문제를 더 이상 심각히 다룰만한 화두로써 순위 매기지는 않는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대우 불도저가 팔레스타인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대우 가스 개발이 버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대부분의 국민은 잘 모른다. 만약 이 사실이 사회적으로 폭로돼 책임을 질 만한 기업인과 정치인들을 불러놓고 청문회를 열어야 함을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제발 고용불안정으로 너도 나도 먹고 살기 힘든 형편에 웬 남의 집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책임져야 하냐는 식의, 다수의 거부반응이 먼저 대두될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보편적 연대실현은 멀지 않다.

오늘날 우리 안에 포화된 자유 무역과 기업투자를 위시한 세계화, 그와 열애중인 ‘열린정치’란 궁극적으로는 극소수집단의 이익창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전 지구적으로 민중들은 어느 새 민주주의를 주도하는 결정권을 상실했고, 도태되어 소외된 삶으로 전락하였다. 그 민중의 수는 빠른 속도로 급증하고 있다. 여기서 기인되는 사회문제들인 이른바 빈곤, 기아, 재해뿐만이 아니라, 폭력과 전쟁으로 신음하는 인류에서부터 자연에 이르는 그 고통들이 어찌 그네들만의 것으로 끝날 수 있겠는가. 다르게 말해 지금 국내에서 우리를 억누르는 반민중적 정책들을 바로잡는 것 역시 우리들끼리 죽을힘을 다해 정권 투쟁하는 것으로 절대 완전할 수는 없다.

몸 안에 퍼져 있는 미세한 혈관들에서처럼 한 인간 역시 유기적 성질과 구조로 얽매여진 집단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체로써 존재한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의 고통도 그리고 어느 한 쪽의 성과도 모두 나와 연결되는 일부이자 전체로써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바로 그런 의미들이 부각되고 진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우리가 아니 내가 말하는 국제 연대를 바라보는 눈이다. 지금까지 짜여진 틀 안에서만 취해졌던 선택을 넘어서고자 할 때, 다양한 관점과 실천들이 융합된 결정체가 탄생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선 밖에서 신음해 온 수많은 이들의 고통은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되고 묻혀져 왔다. 이제 대안세계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일궈나가려는 노력은 바로 이들의 고통을 주목함으로써 시작되길 바란다. 가장 아픈 곳이 어딘지를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보듬어 주고 연대의 틀을 견고히 짜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영위해야 할 공존의 삶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내 삶과 등치시키는 작업이 ‘경계를 넘어’를 향한 시작이었으면……. 그러고 보면 국제연대란 결코 멀지 않은 이들의 보편적 꿈에서 피어난다.

지은님이 활동하고 있는 “경계를 넘어”(http://www.ifis.or.kr/)는 국제연대운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자유·평등·평화의 세상을 향해, 연대의 세계화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실천하는 것을 지향으로 합니다. 민주노총 [노동방송국]에서 녹음 및 방송되는 라디오 방송을 매주 화요일 3~4시에 들을 수 있습니다. (http://radio.nodong.org)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