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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 나도 모르게 나를 얽매는 바로 그 시선_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쉼표하나 

고정관념, 나도 모르게 나를 얽매는 바로 그 시선




한 채윤_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나에겐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다. 다섯 해 정도 전이었나, 짐을 옮기기 위해 골목길에 차를 세워두고 일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힘겹게 목발을 짚고 오는 어느 여자 분이 보였다.  저 걸음으로 저 속도라면 어딜 가는지는 몰라도 참 멀고도 힘들겠다 싶어 만약 가는 방향이 같다면 차를 태워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짐을 옮기면서 힐끔힐끔 점점 가까이 오는 그 분을 확인했고, 나는 속으로 혹여 차를 태워드리겠다는 호의가 과잉친절을 베풀려는 것으로 보이진 않을까 걱정하며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긴장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 분이 차 옆에까지 왔을 때였다. 긴장해서 머뭇거리는 나보다 먼저 그 분이 “어디까지 가나요? 같은 방향이면 좀 태워주세요”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내 입에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어, 저희 지금 출발 하지 않는데요.” 거짓말이었다. 조금 기다리시라고 해도 될 문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조금 전까지의 긴장이 겁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분이 먼저 말을 건네는 건 내게 없던 시나리오였고 갑자기 바뀐 대본에 당황한 연기자였던 셈이다. 다시 멀어져가는 그 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왜 마음과 다른 말을 했는지, 왜 그 순간에 겁이 난 건지 내 마음인데도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그랬지? 왜 그랬지?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해답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읽은 ‘장애여성공감’의 박영희 활동가의 글에 그 답이 있었다. 사람들은 ‘장애인은 모두 착할 것이다(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클라라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라며 알게 모르게 특히 여성장애인에게 더욱 더 수동적이고 뭐든지 감내해내는 한없이 착한 여인상을 기대한다는 분석이었다. 혼자 책을 읽고 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다리가 불편했던 그 분이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면 분명 나는 짐짓 아주 친절한 척 미소를 지으며 “같은 방향이라면 가시는 곳까지 태워 드릴께요”, 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상황이 아니었고, 먼저 친절을 베풀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모습이 낯설었고 그 낯설음과 당황이 두려움으로 바뀐 것이다.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간주해 버리고 그 상황을 종결시켜 버린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두 해 정도 전에도 한 번 있었다. 지하철 환승로를 걷고 있는데 중년의 한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길을 묻고 싶은 표정이기에 나는 별 생각없이 응대를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혀가 잔뜩 굴려진 “익스큐즈 미”였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고 “네?”하고 다시 물었으나 그는 아예 본격적으로 영어로 말할 태세였다. 순간 미친 사람이 아닌가하고 놀랬다가 곧 내게 못된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면 당황해하는 모습을 즐기려는 능글맞은 속셈일 것이다. 나는 불쾌해졌고 경멸에 찬 표정으로 그를 뿌리치고 냉정한 걸음을 재촉했다. 가뜩이나 밤샘작업으로 피곤했던 터라 짜증을 쉬이 떨치지 못해 좀 전의 상황을 되새기며 계속 투덜거리며 갔다. 그러다 갑자기 망치로 얻어맞은 듯 했다. 아차차! 과연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는 교포일지도 모른다. 외국에서 태어났고 오늘 한국에 처음 들어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겉모습만으로 그가 당연히 한국말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부끄러웠다. 일단 외모로만 한국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 나이가 많은 사람이 영어를 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한 것,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경계와 의심부터 한 것,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은 옷차림에서부터 뭔가 티가 날 것이라는 등 그 짧은 순간에 참으로 여러 개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작동시켰다.


  물론, 이런 일들이 있은 후 부끄러움도 느끼고 반성도 하며 장애인 인권의 문제나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는 교육방식의 문제 등에도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지만 나는 이런 그럴싸한 결론들이 끝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두껍고 높은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맞서 이동권이나 생존권 등의 투쟁을 벌이고 차별금지의 법적 보호 장치를 만드는 일로만 다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나의 경험들도 어디에 신고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기껏해야 ‘불친절’일 뿐이겠지만 사건이 일어나던 그 순간엔 매우 복잡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있어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 관련 일을 하다 흔히 겪는 일 중에 하나가 동성애자 혐오가 있거나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엮이는 것’은 싫다는 태도와 접하는 일이다. 퀴어문화축제 ‘무지개 2006’를 준비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상영작품을 섭외하는데 다각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무산되었다. 그 영화의 감독이 자신의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거절은 사실 웃긴 일이다. 마치 <너는 내 운명>을 에이즈영화제에서 상영 요청했더니 자신의 영화는 에이즈영화가 아니므로 안 된다고 하는 꼴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이 자신의 작품이 속할 장르를 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사실 동성애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동성애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거절은 낙인 때문이다. 퀴어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 자체가 동성애 영화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다. 그건 매우 불편한 일이다. 어찌 보면 그도 약자다. 상업적이지도 않고 인권과 문화를 말하는 영화제에, 이미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을 주지 못하겠다는 건 동성애자들 입장에서야 불쾌한 일이지만 나는 단순히 그것을 감독의 ‘옹졸함’이나 ‘동성애공포증’으로 간주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동성애 영화라는 낙인과 그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두려움이다. 


  나는 솔직히 지하철에서 영어컴플렉스가 작동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 인권을 말하면서도 장애인에 대한 다양한 인간상을 머릿속에 구현해내진 못하고 있었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 등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에 물들었고, 서구중심주의니 문화사대주의니 운운해도 국어보다 영어 못하는 게 더 부끄러웠던 것이다. 동성애가 소재가 되는 것과 주제가 되는 것에도 품격의 차이가 생기듯이 말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이 사회가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이간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못한 것에는 주눅 들게 하고 무엇보다 조금 나은 것엔 안심과 특권을 느끼게 만드는 방식. 그래서 주류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약자들끼리 싸우고 그들끼리 멀리하게 만드는 방식. 그래서 결국 우리가 무엇을 뺏기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방식. 그렇게 보면 편견이나 차별이 항상 공격적으로만 표현되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각기 다른 사건들 같지만 나는 이 일들을 평생 내 마음속에 가져갈 것이다. 가끔씩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나 자신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또 똑같은 잘못은 저지르진 않아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족한 성품인지라 인류애나 이웃사랑의 정신을 항시적으로 발휘하고 살만큼 성숙한 인간은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 세상의 이간질에 놀아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기에.


※한채윤님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성소수자문화인권센터는 이 세상의 부당함에 분노하지만 웃으면서 싸우고, 전문적 지식을 갖추지만 쉬운 말로 이야기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이슈파이팅보단 꾸준히 설득하고, 영웅을 만들기보단 평범한 성적소수자 대중의 꿈과 바램들에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의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HIV감염인을 비롯 이들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또한 스스로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 권리 보호와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조직입니다. 홈페이지 http://www.kscr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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