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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만나고싶었습니다_여성학자 임옥희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으레 듣게 될,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이름. 대표적인 페미니즘 문화 운동 단체인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의 대표이자 《여/성이론》의 필진의 주역으로서 꾸준한 집필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퀴어 이론 창시자 주디스 버틀러 해석에 있어 국내의 권위자로 여겨지는 여성학자 임옥희를 만났다. 그녀의 저작 《주디스 버틀러 읽기》는 버틀러의 까다로운 이론 전반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해석하고 있어, 버틀러 이론을 비롯한 여성주의/여성철학에 대한 매료는 자연스럽게 임옥희씨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녀를 만나 한국의 여성주의 이론 구축 및 운동의 방향을 논하고자 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임옥희씨에 대해 읽고 들은 내용은 그녀와의 인터뷰 성사에 대한 기대를 풀 죽이기도 역설적으로 부풀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녀가 대의명분이나 인터뷰 같은 것들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반복되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성’ 다락방 넘나들며 즐겁게 생존하기>(《여/성이론》10호)에 익살스럽게 소개된 바대로 ‘무늬만’ 냉소주의자란 말이 맞았을까,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 들어선 인터뷰팀을 맞아 “어머, 이렇게 예쁘고 젊은 학생들이 오는 줄은 몰랐어요!” 하고 환대하는 그녀에게서 냉소적인 인상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인터뷰를 하는 내내 마치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듯, 그녀의 거리 두기를 하지 않는 말하기 태도가 분명한 인상으로 남았다. 자신의 글에서는 다양한 이론 분석과 더불어 사유하지만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변에 있어서는 가능한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론가가 갖는 권위의 아우라 만들기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대하자 그녀에게 붙여진 ‘냉소주의자’란 말이 정말 뜻하는 바를 짐작할 듯 했다.

여/성

“인터뷰를 어려워해서…”라고 말하는 임옥희씨에게 “우리도 인터뷰를 어려워하니 같이 어려워하며 해봐요,”하고 웃었다. 그녀가 대표로 있으면서 다양한 활동에 몸담고 있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는 어떤 곳일까.

“1997년부터 시작된 일종의 문화운동을 위한 모임이다.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여/성이론》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 공부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활동은 세미나와 글쓰기, 함께 토론하고 쓴 내용을 책으로 묶어 내기 등이다. 회원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세미나를 구성하고 이것이 공적인 강좌로 이어지곤 한다. 이론을 실천하는 방식으로서 글을 내놓음으로써 강좌와 결과물이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모임의 취지는 기존의 틀에 ‘틈새 내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정말 틈새를 내고 있는지가 요즘의 고민이다.(웃음)”

《여/성이론》의 ‘여/성’에 빗금이 들어간 이유가 있을 텐데.

“한국어의 ‘성(性)’이란 단어에서는 젠더(gender)와 성(sexuality)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이 둘을 모두 표현하고자 했다. 성(sexuality)은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뿐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에서 한 개인이 어떤 입장(position)에 놓여 있는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sexuality)을 다룰 때 이런 부분이 잘 부각되지 않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중요한 부분이 간과될 수 있다.”

‘쿨한’ 사회에서 ‘쿨하지 못한’ 페미니즘의 우울

그녀는 <여성의 몸, 재생산, 유머>(《여/성이론》15호)에서 새로운 세기에 이르러 페미니즘의 요구 사항들 중 일부가 제도로 수용된 이후 마치 가부장제의 모순들이 충분히 해소된 것처럼 얘기되고 또 모든 것이 취향의 문제인 양 치부하는 분위기가 세간에 형성됨으로써 도리어 페미니즘 운동이 부딪치게 된 좌절에 대해 쓴 바 있다. 우선 20세기와 21세기의 페미니즘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을 부탁했다. 이 글의 내용에 따르면 2000년 이후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국가 페미니즘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신들을 영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낡은/새로운 페미니즘 사이의 구분이랄까. 지금은 문화 운동의 양식을 띠는 반면, 예전에는 계급 문제를 관건으로 삼아 사회 운동 세력 전체의 목소리를 한 데 묶으려다 보니 명분을 위해 여성의 요구가 희생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은 여성의 주체성 회복이 관심사가 되고 있다.

사회변화에 대한 정치적 열망마저 마치 취향인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운동의 정치성을 탈정치화하고 유행하는 소비현상으로 바꾸어버리기에 안성맞춤인 전략이다. 그러나 사실 취향 자체가 강제된 것 아닌가. “다 됐잖아”란 말로 요약되는, 페미니즘이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얻어냈다는 믿음은 우리가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에 관한 논의를 막아버린다.”

여자들 살기 좋은 요즘 세상에도 페미니즘 얘길 하느냐거나 ‘좀 쿨해지자’는 소릴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이는 여성평등이 이미 충분히 이룩되었으며 또 호주제 폐지와 군가산제 폐지 등을 들어 도리어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들에게 위협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레즈비언 선언이나 비혼으로 남는 것마저 개인적 취향으로 치부되는 육체자본의 시대에 자기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영’ 페미니스트들의 우울증에 대해 임옥희씨는 썼다. 「페미니즘의 제도화는 가부장적인 정치적 문법 안에서 변혁이 아니라 협상하겠다는 의미이다. … 페미니즘 자체가 제도화됨으로써 사회 변화에의 열정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 변화에 대한 열정은 우울로, 혁명에 대한 비전은 좌절로 드러난다.」(<여성의 몸, 재생산, 유머> 中) 페미니즘이 더 요구할 것이 있느냐며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쿨함’과 신나는 생산과 소비가 지향되는 오늘날 사회에서 ‘쿨하지 못한’ 페미니스트들이 부딪치는 갈등에 관해, 또한 이러한 우울에 대한 생존 전략으로서의 ‘유머’에 관해 다음에서 더 살펴보자.

‘유머’와 ‘차이’의 정치학으로

이성애적 가부장제의 구조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은 저항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친밀성,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렇게 상호 모순 될 수 있는 이해들이 정신없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운동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 것으로 보는지 물었다.

“의식은 굉장히 급진적일 수 있는데 그것이 행동까지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성 자신 안에도 ‘갭’(gap)이 존재하며, 이것이 ‘정치적 올바름’ 등의 문제에 있어 모순을 낳기도 한다. 가령 어느 여성이 운동을 위해 자신을 ‘엄격한 채식주의자’나 ‘정치적 레즈비언’ 등으로 정체화했을 때, 사적인 관계 안에서 여전히 가부장적 구조를 반복해 낳고 있다든지 그 정치성을 포기하고 나면 이성애자화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결과를 낳는다. 억눌러 놓을 때 ‘갭’은 언젠가 반드시 폭발하게 되어 있다.”

이론적 앎과 실천, 존재와 인식 차원, 감정과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갭’으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에 관련해 임옥희씨는 ‘인정폭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성애 재생산주의를 거부하는 레즈비언 여성에게 사회는 너의 취향을 인정은 하지만 너도 사실 좋은 남자 만나서 부르주아로 편승하고 애 가지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해라고 관대하게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하나의 선택만을 정당화하는 것이 인정폭력」(여성의 몸, 재생산, 유머> 中)이다. 임옥희씨는 이러한 좌절과 우울에 관해, ‘영’ 페미니즘의 거식증이야말로 재생산 이성애 미래주의를 거부함으로써 가부장제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이 되는 것이라고 봤다. ‘은유적 거식증’을 통해 페미니즘의 우울을 유머로 전환시킨다는 그녀의 관점에 대해서는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비체’에 관한 대목에서 배수아 소설과 버틀러 이론을 중심 삼아 구체적이고 최종적으로 살필 것이다.

질문의 방향을 조금 돌려,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할 텐데 페미니스트끼리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보는지에 관해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인권 사안을 쟁취하는 과정은 특정한 여성들의 이해관계를 못 보게 할 수도 있고 ‘차이’를 짚어내지 못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일례로 ‘성매매특별법’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양한 단체들이 각자 안고 있는 거창하지 않더라도 그들 자신으로선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쟁점들이 있는데, 운동 과정에서 사소한 부분으로 취급되고 남들은 무시해 버릴 때 충돌이 일어난다. 이걸 어떻게 조화시키고 운동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예컨대 젠더, 이성/동성애, 장애/비장애 등의 지점들에서 페미니즘 집단 내의 이해가 첨예하게 나뉘는데, 정책적인 효과 등을 위해 가시화 전략을 좇다 보면 그들 간의 작은 차이들이 무시당하게 된다. 최근에 있었던 퀴어 페스티벌도 그 안에는 다양한 성격의 집단들이 있었을 텐데 가시화와 효율성을 위해 한 데 모일 수밖에 없는 경우일 것이다. 누구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할 것인가. 꾸준히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연대의 의무감이 억압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차이’가 꾸준히 인식되어야 한다.”

“망각은 적극적인 기억”

임옥희씨의 《주디스 버틀러 읽기》를 읽으면서 버틀러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버틀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임옥희씨의 개인적인 동기를 물었다.

“과거에 《문학이론》이라는 책에서 버틀러 이론을 가져와 작품을 분석하다가 처음 접했다. 버틀러를 좋아하는 건 그녀가 계속 무정부주의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 때문이다. 뭐랄까,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기존 체계를 향해 깐죽거린다는 느낌.”

젠더(gender)가 성별(sex)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성별(sex)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버틀러의 주장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런 얘길 하면 일각에서는 한국 사회에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임옥희씨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다.

“나는 반대로 버틀러의 유행이 지나갔다고 본다. 버틀러가 한 논의의 유효성이 한물갔다기보다는 사회의 유행(담론)이란 게 워낙 빠르게 흘러가니 이제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할 거라는 얘기다. 사실 버틀러가 지적한 문제점들이 한국 사회에서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를 생산 양식으로 보았던 분석이 현실적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다음 논의로 넘어갔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라깡,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망각은 적극적인 기억이니 망각하게 될 때 비로소 문제해결이 된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페미니즘 이론가 중 우리가 새로 찾아야 할 사람으로 누굴 들 수 있을까.

“해러웨이 쯤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녀에 이르면 유전공학을 통해 재생산에 대한 새로운 얘기가 나오게 된다. 그녀의 이론에 따르면 마치 SF처럼, 과학도 모든 것이 욕망인 세상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 과학의 물신화에 반대해서 과학도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체계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 담론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 과학 이론도 다루고 더 애써서 운동해야 한다. 코드 전환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제자리에 있기를 거부하는 ‘비체’들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에 실린 <비체들의 유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임옥희씨는 거식으로 가벼워진 몸이 예술과 정치로 승화된다는 얘길 쓴 바 있다. 여기에서 거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구체화를 부탁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은유로서의 거식증’으로, 신체적으로 굶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멋있는 거다”라는 기준을 거부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교수로 남고, 출세를 하고 제도화되는 삶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삼키지 않는 것이다. 먹지 않음으로써 사이즈 44를 만들겠다고 하면 자본주의 생산/소비구조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셈이니까 도리어 ‘은유로서의 거식증’의 반대가 되는 거고.(웃음)”

이 글에서 배수아의 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소재로 삼았고, ‘은유로서의 거식증’ 및 ‘비체 되기’ 등 임옥희씨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점들과 관련해 그녀의 소설들을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작가 배수아와 그녀의 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들었다.

“좋아하는 작가다. 직접 찾아가 만나기까지 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녀가 쓰는 글과 자신의 소질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전형적 모범생의 느낌이랄까… 다시 말해, 깽판 치는 것이야말로 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정신’, ‘고뇌’인 양 구는 일부 남성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허풍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진지하게 정말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종류의 착실한 인상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배수아의 신간인《훌》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도 ‘회색 時’라는 단편이 좋다. 우리는 시간을 일직선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이 뒤섞인 작품을 대하면 편치 않다. 배수아의 여러 작품들을 보면 시점이 모호하고, 가령 ‘회색 時’에서는 어색한 외국어식 문장과 미래완료시제가 쓰이기도 한다. 이 소설 속에서는 등장인물 세 사람이 음식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 장면이 재연된다. 그런데 이들이 실은 이미 죽은 자들인지, 아님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의 장면이 회상되고 있는 것인지, 당시의 시점인지 알 수 없다. 그 시간이 정말 흘러갔었는지.” 참고를 위해 배수아의 《훌》에 나오는 한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간혹 나는 미리 그것들을 용서 했으며, 아직 만나지도 못한 것들과 이별하기도 했고 사랑하기도 전에 싫증을 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나는 때때로 미래의 일을 ‘기억’하곤 했다.」 임옥희씨는 제목이 암시하듯 <비체들의 유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배수아의 언어와 그녀가 그린 인물들의 정치적 가능성을 ‘비체 되기’에서 찾는다. ‘비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짧게 필요할 것 같다. 여성의 늘씬하게 내려뜨린 머리칼은 대개 매력적으로 그려지지만 동일한 머리카락이 음식 속에 들어가 있으면 불쾌하고 또 흙이 땅을 떠나 침대 시트에 묻어 있을 때야 부자연스럽고 더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염이나 불결은 그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 제자리에 위치하지 않는 어떤 것의 속성이다. 크리스테바는 이처럼 ‘제자리’에 있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비체 abjection 라고 일컫는다. 비체는 정체성, 체계, 질서를 교란하며, 정해진 자리, 위치,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비체들의 유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中) 따라서 어떤 것을 ‘비체’로 규정하는 시선에는 자기 자신을 그 사회의 ‘주체’로 규정하는 지배논리가 숨어있게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끈거리는 질, 혹은 남자를 삼켜서 먹어치우는 톱니와 같은 여성성」(《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서문 中) 에 대한 공포를 통해 불결한 것으로서의 점액질과 여성을 결부시키는 것이 바로 가부장적 상징질서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버자이너 덴타타(이빨 달린 질)’에 대한 공포에 자기소멸에 대한 남성의 불안이 투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주체를 거세시키는 남근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는 다음의 악어 우화에 반영되어 있다고 임옥희씨는 설명한 바 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믿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침대 밑에 악어가 산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의사는, 악어는 당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침대 밑에도, 다락에도, 벽장에도 악어는 없다, 그러니 안심하라면서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친구에게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아, 악어에게 잡아먹힌 그 친구 말인가요?”라는 반문이 되돌아왔다.」(《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서문 中)

“‘버자이너 덴타타’(이빨달린 질)에 대한 공포는 의존에 대한 남성의 자기 부정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얘기하면 이러한 거세의 공포가 자율성 획득을 위한 폭력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모두 불안한 존재인데, 질문거리는 가부장제 내에서 이러한 불안을 누구에게 적용시키느냐에 있다고 임옥희씨는 말했다.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선으로 정의내리고 성을 통제함으로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유지되는 것일 터이다. 이때 기존의 틀 안에서 기존의 언어를 사용해 대응하는 대신 오히려 스스로 ‘비체’가 됨으로써, 즉 궤도에서 이탈해 제도화된 언어를 방언으로 역전시킴으로써 국가, 가족, 젠더,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유머를 발휘하는 데서 ‘은유로서의 거식증’의 전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주디스 버틀러가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펼친 주장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의 자식으로 태어난 안티고네는 국가와 법의 대변자인 왕 크레온에 대항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전해지는 소포클레스 비극 속의 인물이다. 오이디푸스의 나머지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위를 놓고 벌인 결투 끝에 모두 사망하고, 새로운 왕 크레온은 둘 중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이므로 그를 매장하는 자를 죽음에 처한다고 선포한다. 이에 아랑곳않고 사랑하는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해 크레온에게 생매장의 벌을 선고받은 안티고네는 종국에 무덤 속에서 자살하며 이어 비극적 운명은 남은 사람들까지 모조리 집어삼킨다. 버틀러는 안티고네가 헤겔의 주장대로 국가법에 대항했으므로 처벌받아야 할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도, 이리가레의 주장대로 친족을 대변하는 여성적 영웅도, 라깡의 주장대로 보편 선을 넘어선 숭엄한 존재도 아니라고 기존철학자들의 관점을 비판했다.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친족의 법은 국가와 아버지의 법에 양도되어야 한다고 본 헤겔은 정치의 영역이자 공적영역으로서의 폴리스와 사적 영역이자 재생산의 영역인 오이코스(가내살림)를 구분했다. 도시국가 유지에 필요한 재생산 역할을 맡아주면서 동시에 공동체 이익에 반하는 존재이기도 한 여성은 헤겔에게 있어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였고, 이러한 관점은 여성을 성애화된 존재이자 동시에 모성을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성녀/창녀’의 모순적 이분법을 통한 가부장제의 폭력과 별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다른 한 편 안티고네를 친족의 대변자이자 여성영웅으로 간주한 이리가레 역시 헤겔과 마찬가지로 친족관계와 사회적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모순을 저질렀다. 버틀러는 근친상간의 자식인 안티고네가 규범적 친족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존재라는 점을 들어 이들을 반박한다. 또한 왕 크레온에게 호통치는 안티고네의 언어는 남성의 것을 모방한다. 버틀러의 해석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남성적 언어와 남성적 코드를 수행함으로써 젠더의 경계마저 흐리고, 아울러 공적, 정치적 영역과 오이코스 영역을 교란하는 존재이다. 또한 명예남성으로서 오빠와 아빠를 동시에 사랑하는 그녀는 동성애자인가, 이성애자인가. 그녀는 섹슈얼리티도 교란하는 것이다.(《주디스 버틀러 읽기》 참조) 자신이 속하지 않은 언어, 배제된 언어로 말함으로써, 규율 담론이 배제했던 이성애 안의 동성애, 여성성 안의 남성성, 오빠 안에 있는 아버지 등을 환기시켜 최종적 동일시가 불가능한 모호한 주체로서 존재함으로써 도리어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게 되는 우울증 환자가 안티고네라고 버틀러는 보았다. 버틀러가 펼쳐 보인 이 가능성으로부터 ‘낯설게 말하기’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긍정하고 싶다. 임옥희씨의 ‘은유로서의 거식증’과 ‘비체 되기,’ ‘우울을 유머로 전환’(<여성의 몸, 재생산, 유머>)하기, 그리고 배수아의 방언에 그녀가 거는 기대에서 역시 이와 닮은 함의를 발견할 수 있는 듯 하여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자 한다.

「버틀러가 안티고네의 주장을 다시 읽어내려는 것은 국가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치적 위상이 가능한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주의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국가의 지원과 권위를 빌려오고자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티고네의 저항정신은 어디로 갔는가를 버틀러는 새삼 되묻는다. 그녀에게는 젠더뿐만 아니라 젠더를 구성하는 상황과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법 또한 심문의 대상이다.」 (《주디스 버틀러 읽기》 中)

이는 지난 6월 11일 민노당 성 소수자 위원회 등의 단체들의 주최로 열린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새로운 길 찾기’ 워크샵에서 마찬가지로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소속인 박소영씨가 한 발표의 내용을 상기시키기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족구성권에 대한 고려와 운동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나아가 가족을 구성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이때도 흥미로웠다.

경계를 흐리는 시선, 틈새를 넓히는 말하기

한 편 임옥희씨는 성별 구조나 가부장제 구조에만 모든 잘못을 돌리는 것은 남성과 여성 자신의 책임과 욕망을 회피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성별 구조와 가부장제만 문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과거엔 그저 개인적인 짜증과 분노만 느낄 수 있어 사적인 것으로만 치부되던 문제들에 관해 드디어 조직적으로 접근하고 비판할 수 있는 목소리, 신선한 호흡을 안겨 주지만, 반대로 이론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 개인의 책임에서 눈 돌리게 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장애인, 이주 노동자, 이주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동하는 공감을 대한 임옥희씨의 생각과 전하고 싶은 말을 끝으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공감의 활동에 공감한다는 말로 웃으며 말머리를 뗐다.

“공감의 어떤 활동에 관해서든 공감한다. 다만 누구든 스스로 잘 보지 못하는 지점(blind spot)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권 단체들을 바라보며 내가 우려하는 점은, 마치 노예가 노예로서 존재/생존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제공돼야 한다는 표현처럼 사회적 약자에게 최소한만 제공하는 선에서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해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신발을 신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감이란 말은 동정으로 변질될 수 있어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공감은 종종 우월성을 확보한 상태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이타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말 그 사람들의 신발 안에 들어가서 해야 한다.”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경합이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으로 강자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자를 배려해 주고 최소한의 빵 조각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와 가치가 한 장에서 만나 부딪치고 서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인권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도적 장치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 ‘객체’ 혹은 ‘비체’가 된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가부장적 이분법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야말로 온갖 인권 운동의 핵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가부장제 폭력의 피해자는 여성뿐이 아니며, 여성주의 운동의 본질은 여성이 사회진출을 얼마나 더 많이 하느냐가 수치로 계산되는 정도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화, 주변화에 대해 싸우는 여성주의 의식 안에는 장애/비장애, 서구/비서구, 가진 자/가지지 못한 자 등으로 나누는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대가 있고, 이것이 곧 기존의 남성적 언어에 의한 “모든 억압적인 인간관계 혹은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고민거리는 여성에 대해 부재하는 수많은 사회장치들을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가, 또한 비정규직 문제의 심화와 더불어 갈수록 불안해지고 가학적으로 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해 법에만 의존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적은가 등이라고 대화 말미를 정리하는 임옥희씨의 이야기에 맞장구 쳤다. 다양한 사회 세력이 각종 사안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되 ‘차이’의 정치를 위해 유연성과 신축성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그녀는 끝으로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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