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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노동인권# 취약 노동

진실을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

지난 7월 윤지영 변호사와 함께 아파트 안내원 2분을 대리하여 휴게시간 임금과 회사와 입주자대표회장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의 1심에서 휴게시간 임금 청구와 위자료 청구가 모두 인정되었다. 상대방의 항소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원고들은 20년간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의 A동과 B동을 각각 맡아, 호텔에서처럼 로비 안내 업무를 수행하였던 아파트 안내원 두 분이었다.

근무 초기에는 급여가 최저임금보다 높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으로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09년부터는 각 동에 2명, 원래 4명이었던 안내 직원은 세 명으로 줄어들게 되어, 세 명이 교대로 아파트 두 동의 안내 업무를 도맡게 되었다. 인력이 축소되면서 원고들은 무급인 휴게시간에도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1년을 그렇게 일하다 참다못한 원고들은 2020년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만 원고들의 월급을 10만 원 인상하는 안은 일부 주민들의 반대로 입주자대표회의 안건에도 올라가지 못한다. 원고들은 남은 안내 직원마저 퇴사하여 둘만 남자, 다시 임금 인상에 대해 문의하지만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한다.

원고들은 결국 휴게시간에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고자 고용노동청에 임금체불을 진정을 접수한다. 입주자대표회장은 이를 알게 되자 “괘씸”한 원고들을 아파트에서 쫓아낼 것을 회사에 요구한다. 입주자대표회장의 입김에 아파트에서 일하는 모두의 밥줄이 걸려 있는 아파트 관리 회사는 원고들에게 이 아파트 말고 다른 자리를 찾아주겠다고 얘기한다. 관리 회사가 바뀌는 동안에도 이 아파트에서의 로비 안내 업무를 지속하였던 원고들에게 다른 아파트로 간다는 말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렇게 원고들의 휴게시간 근로에 대한 임금과 원고들에게 원래 일하던 아파트에서 더 이상 일 할 수 없다고 통보한 회사와 회사에게 원고들을 쫓아내라고 요구한 입주자대표회장에게 위자료를 청구하는 이 소송이 시작되었다.

이 소송의 1심 마지막 기일에서 원고들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남긴다.

“많은 입증자료를 제출한 저희와 달리 특별한 자료 없이 구두상 진술만 일관해온 피고의 주장이 받아들여질까봐 두렵고 억울한 마음입니다.”

원고들은 알았을까, 밀린 임금을 받고자 노동청에 진정을 넣은 것이, 3년 뒤 위 법정에서의 진술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숨 쉬듯 당연하게 이어지든 매일의 노동이 ‘진짜’였음을 증명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민사소송에서는 주장되는 모든 사실은 입증자료로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소송은 진실의 싸움보다는 증명의 싸움에 가깝다. 증명의 싸움에서 ‘을’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매일같이 출근했던 일터지만 나의 노동은 자료로 ‘증명’되어야만 한다. 나의 ‘노력’과 ‘해고의 부당함’과 ‘ 무고함’ 모두 증명되어야만 한다. 증명하지 못하면 나의 노력은, 나의 시간을 법원은 모른다.

회사는 거짓 진술서와 평가, 때로는 증인까지 동원해서 나의 시간을, 나를, 지우려고 노력한다. 이 사건에서도 거짓이 가득한 답변과 진술서들을 받아야 했다.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고용노동청의 보고서를 피고가 증거로 제출했을 때에는 나는 그만 포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원고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원고들은 퇴사한 직원들을 찾아 어렵게 진술서 작성을 부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 준비서면이 법원에 제출되었다.

마지막 기일에 원고들의 진술이 끝나자 재판장은 “제출된 자료를 면밀히 살펴 결론을 내리겠다”라는 대답과 함께 선고는 2주 뒤에 있을 것이라 말하며, 1심 변론을 종결하였다.

절박한 원고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상투적인 표현일까 아니면 원고들의 진심이 재판장에게 전달된 것일까? 긴장하며 선고기일에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위자료 청구와 휴게시간 임금 청구 전부가 인정된 것이다. 나중에 판결문을 확인하니 원고들의 옛 동료들이 써 준 진술서들도 판결문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날듯이 기뻤고 동시에 허무했다. 진실을 얻기 위해서 법정에서만 2년이 걸렸다. 상대방이 제출한 증거는 3개, 우리가 제출한 증거는 60개가 넘었다(사실 입증자료 60여개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니고 소송의 세계에서 3년은 긴 시간도 아니다).

사건을 함께 수행했던 윤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을 통하여 고용계약의 주체가 아닌 ‘고객’이라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아파트 직원들의 인사를 결정함에도 불구하고 근로기준법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 입주자대표회장에게 불법행위책임이라도 묻고 싶었다고 한다. 변호사님의 바람대로 전보명령을 한 회사뿐만 아니라 입주자대표회장에게도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되었다.

하나의 하급심 판례지만 어찌됐든 고용주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서 이를 행사하여 인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한 불법행위임이 확인된 것이다. 이 사건이 아파트 관리 회사를 멋대로 주무르지만 서류상 고용주는 아니니 고개를 돌리는 입주자대표회의 뿐만 아니라 하청 직원들을 멋대로 다루는 원청, 그리고 어쩌면 고객이라는 이유로 멋대로 누군가를 해고 해 달라 요구하는 세상의 진상들에게도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되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건에서 졌으면 조금 무기력해졌을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공감의 구성원들도 각자의 크고 작은 파도를 겪어낸다. 공유되는 ‘성공’의 순간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주춤’의 기억들이 있다.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흐지부지 끝난 사업들, 그리고 이내 마음의 짐으로 남는 얼굴들. 오늘의 기쁨만큼이나 과거의 슬픔과 분노와 자책도 존재한다. 슬픔과 분노와 자책은 계절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오늘의 기쁨도 다시 찾아올 것이라 믿게 된 것 같다. 그러니 ‘해내야 한다’가 아니라 ‘그냥 한다’는 마음으로 오늘의 기쁨을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자 한다.

강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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