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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칼럼# 성차별# 젠더

답도 모르면서 질문도 안 하는 어른 : 소중한 책, 117권에 대한 열람대출제한⋅ 폐기요구를 목격하면서

변호사가 되고, 성폭력 예방 교육이나 성인지 교육 기회를 가끔 얻는다.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이 강의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아닌지, 특별히 성인지 교육법이나 젠더권력에 대한 이론적 연구 경험을 가진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성폭력 관련 법제나 피해자 지원에 관한 강의를 요청 받을 때마다 마음 한켠에 “자격이 있나”와 동시에 “법률교육으로 성인지 교육이 될까” 걱정하며 쥐구멍 파는 심정으로 강의를 준비한다. 

(아는 게 없으므로)아는 것을 전달한다는 것은 포기하고, 필자의 혼란과 고민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구성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안을 볼 수 있는 다른 관점과 질문이다. 누군가 나의 질문으로 마음 속에 작은 파동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소심함이다. 그런데 교실의 호흡은 날숨만 있진 않아서 수업을 듣는이의 반응에 들숨도 신중해진다. 타고나는 지식이 아니니 공부가 필수라, 항상 책을 찾게 된다. 반가운 책 목록이 눈에 띈다, 그런데 금서 목록이다. 최근 보수성향의 민간 단체가 공공도서관에 소장된 책 117권이 청소년 유해 도서에 해당한다며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관련기사). 

 

유해 도서? 유익한 지적(的) 업적! 

기사에 따르면 전국학부모연합회 소속 단체들은 젠더·성평등·인권 등을 다룬 어린이·청소년 책이 “유해 도서”라며 공공도서관에 “열람 제한 및 폐기”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최근 일부 도서관들은, 단체들이 민원을 제기한 도서출판물 117종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해달라고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의뢰했다(관련기사). 

117권 중엔 익숙한 책도 있다. 강의 준비 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주 참고하는 김고연주의 <나의 첫 젠더수업>(2017, 창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책을 읽을 십대들에게 나를 찾는 여행의 중요한 사실은 “이 여행은 절대 혼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고 따뜻한 인사말을 전하며 격려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른 사람과의 동행을 통해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배척을 통해, “모욕적이고 혐오스러운 표현으로 타인을 지칭하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저절로 갖게 되다는 큰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어 고민이라는 (오늘을 예상한 것 같은) 저자의 지적에 어떤 독자는 위로를 얻을 거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격려와 위로를 받을 기회다. 혼란과 무지를 내보여도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다. 있는 나와 함께 길을 걸어주는 저자와 독자들 덕에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학습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긍정적 존중과 솔직한 접근, 성별과 성정체성 그리고 성차와 성역할에 대한 탐색, 필자도 계속 중인 자아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이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말이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성역할 고정관념, 성별 위계와 성차별,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도 긍정적 자기 탐색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불쾌한 경험 슬펐던 기억 무서웠던 일 혹은 미안했던 일 등을 곱씹으며 깊고 넓은 이해가 가능하다. 누군가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함께 길을 찾으며  걸어주는 ‘유해도서’들은 유익한 지적 결과물이다. 

 

답도 모르면서 질문도 안 하는 사람들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법률조력에 관한 강의는 피해자관점에서의 사건 해결의 의미, 형사 절차의 가해자 중심적 사고의 문제 등을 젠더기반폭력의 원인과 관련지어서 설명하고, 실제 피해 사례들과 절차 상 발생하는 여러 사건 사고와 결과(판례 등)들의 의미를 그러한 문제의식에 연결해 해석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성인 남성이 절대 다수인 조직을 대상으로 디지털성폭력 관련 법률 교육을 진행하고 나면, (강의를) 잘 하고 나온 걸까 생각을 한다. 수업 중에 개인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우연히”, “실수로” 사진을 찍은 경우에도 처벌 받을 가능성이 있는지, 동의를 한 촬영을 뒤늦게(피해자의 변심으로) 억울한 일을 피할 방법이 있는지 등의 질문을 받는다. 본인의 사례는 아니지만, 아는 사람의 사정이 딱해서 물어보는데 라는 질문이다. 

여러 분석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피하고 싶은 ‘법률 교육의 부작용’이다. 젠더폭력 관련 교육이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법적 절차나 처벌 중심으로 구성될 경우 발생하는 문제다. 처벌되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는 엄벌로 오랜 폭력이 통제될거라고 생각하거나, 잘못된 처벌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노하우로 ‘불미스러운 일’에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젠더기반 폭력의 원인이나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뤄보려고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본다. 그렇지 않으면 수업 형식을 갖춰 소중한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이 근본적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성폭력은 왜 일어날까? 라는 근본적 질문을 피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존중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고민할 필요 없는) 사람, 자신의 욕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경험을 한 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답도 모르면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답도 모르면서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무책임한(무지한) ‘어른’들이 바라는 교육의 결과는 아닐까싶다. 

 

더 일찍 배웠더라면, 더 빨리 만났더라면 

대학생들 대상으로 피해자변호사 관련 실무 교육을 진행하고 나면 꼭 ‘여학생’ 한 두명이 교실에 남아 개인 면담을 요청한다. 질문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비슷한 상황에 처해 보니 단순한 질문은 아니었다. 

성폭력 피해 사례와 사건 해결과정에서 피해자가 경험하는 2차 가해 특히 피해자에게 원인을 돌리는 편견들에 대한 분석(필자의 혼란과 고민)이, 수업을 들은 ‘여학생’들에게는 자신의 경험과 만나는 지점들이 있어 미세한 파동을 만든 것이다. 학생들은 그 경험과 언어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한다. 과거의 어떤 경험을 피해 경험으로 다시 쓸 용기를 내기가 어려운 현실, 현재 진행형인 폭력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느끼는 무력함, 새로운 관계로의 진입을 주저하게 되는 실체 없는 불안. 사연은 다양한데, 비슷한 점은 사회구조적 상황이나 상대방의 무례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탓하고 괴롭히는 자문자답이었다. “예민한 걸까”, “이상한 걸까”, “나만 이런 걸거야”. 고립되도록 둔 것은 누구일까. 답도 모르면서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무책임한(무지한) ‘어른’들의 만행의 결과는 아닌가 의심해 본다. 

거의 동일한 법적 소재로 구성된 강의 내용인데도 듣는 이들의 경험치에 따라 이해도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더 일찍 배웠더라면, 더 빨리 만났더라면 다른 선택, 다른 대응을 했을 수도, 상흔은 남았더라도 상처가 깊진 않았을 쉽게 털어낼 수도 있었을 사건들이 반복되고, 누군가는 그 경험에 지나치게 오랫동안 머무른다. 강의실에 남아 수업 내용을 곱씹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는 학생들의 혼란과 고민의 흐름을 들으며 이런 저런 읽어볼 거리를 주고 받으면서, 우리는 서로 이미 셋 이상의 동지를 얻는 거다(화자, 저자, 나).

나를 둘러싼 사건 사고들 속에서 근본적 원인을 들여다 보는 것을 피하지 않고 해결방향을 모색하는 힘을 기르는 것, 나와 함께할 사람들을 찾는 것, 좋은 글과 생각을 이른 시기부터 제대로 자주 접해야 하는 이유다. 성평등 관련 서적이 필독서가 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소중한 117권 권장도서로 이해하고, 더 가열차게 공부하자.

 

백소윤

# 여성인권# 성소수자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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