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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칼럼# 부당해고# 취약 노동

승소 이유

드디어 승소했다. 재택근무 노동자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회사가 소를 제기한 때로부터 1년 4개월, 의뢰인이 해고를 당한 때로부터 2년 3개월 만이다. 개인적으로는 8년 3개월을 기다린 판결이다. 실은 8년 3개월 전에 매우 유사한 사건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죄책감, 미안함, 부끄러움과 아쉬움 때문에 내내 잊지 못했고, 그래서 빚진 마음으로 이번 소송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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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승소한 사건의 의뢰인은 두 명이다. 포털사이트 ‘네이트판’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모니터링하고 음란물, 무단 광고, 명예훼손 글 등을 삭제하는 일을 한 사람들이다. 소위 검수요원이다. 검수요원들은 집에서 근무한다. 컴퓨터가 있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으면 업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단 검수요원은 업무 시작 전 ‘클럽’ 게시판에 들어가서 당일 검수해야 할 구역을 확인해야 한다. 검수구역은 회사 관리자가 매일 변경하여 결정하고 공지한다. 근무표 확인 후 검수 요원은 ’팀룸‘에 접속해서 회사의 공지사항 및 지침도 확인해야 한다. 공지사항 및 지침 확인 후 전날 올린 업무보고서에 대한 회사 관리자의 피드백도 확인해야 한다. 업무 개시 10분 전에는 ’네이트온‘에 접속해서 회사 관리자에게 “업무 시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사내망(VPN)에 접속해서 정시에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참고로 ’네이트판‘, ’클럽‘, ’팀룸‘, ’네이트온‘ 모두 SK커뮤니케이션즈의 것이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검수요원은 업무보고서를 작성해서 회사 관리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의뢰인 중 한 명은 이 업무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20시부터 자정까지, 일요일에는 1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진행했다. 다른 한 명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2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요일에는 2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진행했다. 두 명 모두 매월 시간 당 최저임금으로 계산한 고정급여를 받았다.

집에서 근무했지만 규율은 엄격했다. 검수요원은 모든 게시물에 대한 검수를 등록 시각 기준 30분 내에 완료해야 한다. 예컨대 2시 반에 올라온 게시물을 3시 전까지 확인해서 그대로 유지할지, 삭제할지, 더 나아가 이용자를 제재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업무 시간에는 메신저를 켜놓고 회사 관리자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검수 속도가 늦어지면 회사 관리자가 연락을 하기도 한다. 메신저에 10분 이상 접속이 안 되어도 관리자가 연락을 한다. 참고로 컴퓨터가 10분 넘게 작동하지 않으면 메신저에는 “자리비움”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자리비움’ 메시지가 뜨는 것은 징계 사유다. 그렇기 때문에 검수 요원은 업무 내내 자리를 뜰 수 없다.

어떤 게시물을 삭제하고 제재할지도 검수 요원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회사는 검수 가이드와 100개 이상의 지침을 만들어 준수하도록 했다. 혹 검수요원이 가이드·지침과 다르게 검열을 하면 회사 관리자가 검수요원에게 수정을 지시하거나 혹 직접 수정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만 놓고 보면 의뢰인들이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지 않을 뿐이지 일반적인 근로자와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를 통제하기 위해 회사는 더 많은 장치를 마련했다. 딴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를 하고, 정해진 대로만 일을 하도록 각종 지침을 만들었다. 그러나 회사는 의뢰인들이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회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수요원은 실질적으로 회사에 고용된 근로자라며 회사가 5년 넘게 근무한 의뢰인들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은 것은 부당해고라고 판단했다. 8년 3개월 전 법원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8년 3개월 전과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승소 소식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실은 과거 사건의 의뢰인(‘K’로 호칭하겠다)도 이번 사건의 의뢰인과 같은 일을 했다. 팀장도 같은 사람이었고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동일했다. 메신저부터 게시판, 사내망까지 모두 SK커뮤니케이션즈의 것이었다. 사실상 같은 사건이었다.

첫째, 증거의 차이가 컸다. 과거 사건에서는 근로자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회사가 동료 검수요원들로부터 근로자가 아니라는 취지의 진술서들을 대거 받아 제출했다. K와 같은 신분이었던 동료 검수요원들은 본인들의 목에 칼을 겨누는 진술서를 써 주었다. 잘리지 않고 계속 일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현실을 잘 모르고 증거로 채택한 법원일 게다. 이번에는 그런 진술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동료 검수요원이 증인으로 나서 주었다. 회사에 불리하고 노동자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퇴사하였고 다른 직장을 구해 일을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인과 무관한 사안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 그것도 엄숙하기 그지없는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도 팀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말이 증인이지 당사자로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장이 검수요원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검수업무를 총괄했기 때문이다. 노동사건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증거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회사는 각종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불리한 자료는 일부러 숨기기도 한다. 원하는 내용의 진술서도 받을 수 있고, 사실상 당사자인 직원들을 증인으로 신청할 수도 있다. 반면 노동자는 진술서를 받기도 증인을 구하기도 어렵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서류도 적다. 특히 법상 근로자성이 다툼이 되는 사건에서는 이를 주장하는 노동자가 입증책임을 부담하기 때문에 싸움은 더 힘겨울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판사님들이 꼭 알면 좋겠다.

둘째, 시작이 달랐다. 과거 사건은 퇴직금 청구 사건이었는데 K가 먼저 노동청에 체불임금 진정을 했다. 그런데 절대 다수의 근로감독관이 계약의 실질을 보지 않고 형식만 따진다. 당시 근로감독관도 업무위탁계약서만 보고 체불임금 진정을 각하했다. 각하 판단을 받은 K는 나홀로 소송으로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소가 350만원의 소액사건 1심 판사는 기록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중간에 내가 대리인으로 선임되면서 청구취지를 변경했는데, 판사는 변경 전 청구취지에 대해 판단했다. 판결 이유도 없었다. 노동청 판단만 믿고 판결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항소를 했지만 기각되었고, 상고를 했지만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었다. 소액사건은 심리불속행이 기본이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심리가 진행되는데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의 가치는 소가와 비례하지 않는다. 금액이 적더라도 파장이 큰 사건이 있는데 지금의 시스템은 철저하게 소가 중심이다. 이번 사건에서는 부당해고를 당한 의뢰인들이 노동위원회에 먼저 구제신청을 했고 지노위에서는 졌지만 중노위에서는 이겼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소송을 할 수 있었다.

셋째, 과거에 나는 너무 안일했다. ‘K가 근로자가 아니면 누가 근로자란 말이냐’며 당연히 이길 소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길 수 있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게 없다. 이긴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안일하게 준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 것 같은 소송에서, 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가 많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말은 소송에도 해당된다. 판사가 스스로 알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을 다루는 판사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떠먹여 주는 것은 변호사의 몫이다. 판사가 잘 알지도 못한다고 비난하기보단 내가 잘 설명했나, 내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나 반성하는 것이 다음 소송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8년 3개월 전에는 재택근무가 드물었다. 외근직을 제외하면 모든 노동자가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했다. 판사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다 집요하고 꼼꼼하게 재택근무는 근무 방식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부족한 내 탓이었다.

넷째, 인연이다. 이 사건을 하게 된 이유가 좀 독특하다. 이번 사건의 의뢰인 중 한 분이 무턱대고 사무실로 연락을 해왔다. 부당해고를 당해 구제신청을 했는데 회사가 과거 사건의 판결문을 증거로 제시했다며, 과거 사건의 기록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K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연락을 받은 후 아주 오랜만에 K에게 연락을 했다. K는 아주 반갑게 연락을 받아 주었고, 본인은 졌지만 다른 검수요원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이번 사건의 의뢰인과 K가 닿게 되었다. K가 그랬다고 한다. 꼭 윤 변호사한테 일을 맡기라고. K의 칭찬 덕분에 칼을 갈았다. K 덕분에 이긴 사건이었다.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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