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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칼럼# 차별# 혐오

기차여행의 단상 – 그 무시와 혐오는 우연이었을까

부산에서 서울 가는 아침 기차를 탔다. 출근이지 싶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많아서 장거리 출퇴근 하는 사람이 많구나, 새삼 놀라웠다. 기차 안은 금세 노곤한 졸음으로 가득 찼고 전화 통화는 객차 밖에서 하라는 안내방송이 수시로 나오는데, 바로 뒷자리 승객이 연신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2~30대 청년의 목소리였고, 약간의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 같았다. 출발지에서 배웅한 사람, 도착지에서 기다리는 사람과 수시로 통화 하고 있었다. 기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다음 정거장이 어디인지, 목적지까지 어떤 정거장을 거치는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주고받고 있었다. 생애 처음 홀로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 같았다. 불안보다는 한껏 들뜬 긴장감, 설렘과 기대 가득한 목소리였다. 저절로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옆자리 청년은 졸지도 못하고 기차가 가는 길을 확인하며 전화 통화를 거들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기차를 타고 목적지를 놓칠까 봐 초조했던 일, 아직 어린 아이를 처음 혼자 슈퍼에 보내놓고, 집 앞 가게도 못 보내면서 어떻게 세상에 내놓겠냐고 마음을 다지면서도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일, 갖가지 기억을 떠올리며 피곤한 장거리 업무일 뿐이었던 기차 타기가 즐거운 여행처럼 느껴지던 딱 그때였다.

맞은편 대각선으로 몇 자리 앞 좌석, 양복에 넥타이 맨 단정한 정장 차림의 한 승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거기 조용히 안 해?” 내게는 그 고함소리가 더 시끄럽기도 했는데, 그보다 ‘반말’에 깜짝 놀랐다. 이주민들과 여기저기 같이 다니다 보면 성별과 노소 불문한 반말과 싸움질을 하게 될 때가 많았다. 민원인에게, 환자에게, 고객에게 왜,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합니까?, 라며.

그다음 주 또 서울 가는 아침 기차를 탈 일이 생겼다. 기차가 스르륵 출발했는데, 이번에는 몇 자리 뒷 좌석 옆 통로에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세련된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어떤 승객이 팔짱을 끼고 서서 누군가를 내려 보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절대 존댓말은 아닌 어투였다. 자신의 좌석이라고 생각한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나 보다. 기차에서 그런 일은 가끔 있다. 대부분은 호실을 착각한 경우지만 기차 시간이나 날짜를 착각한 경우도 보았다. 어떤 경우든 승차표를 확인해 보면 금방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선 사람은 마치 자기 자리를 도둑맞은 사람처럼 화를 버럭버럭 내고 있었고, 앉은 사람은 그 서슬에 제대로 항변을 못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에게 저러는가 싶어서 목을 쭉 빼고 돌아보았다. 앉은 사람은 이주민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끼어들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는 사이 누가 불렀는지 직원이 왔다. 다행히 떠난 사람은 고함치던 사람이었다. 저지른 말과 행동에 걸맞은 사과를 하고 떠나야 했겠지만 듣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이주민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그 사람들이 반말과 고함으로 대응했을까?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기보다 계산된 권력관계의 결과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그동안 쌓은 지식, 경험, 직관을 동원해 상대방과 나의 지위, 그 사이의 권력관계, 나의 말과 행동에 돌아올 반작용을 계산한 위에, 모른 척할지, “죄송하지만…”이라고 시작할지, 직원을 부를지, 면전에 반말과 고함을 쏟아낼지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이태원 참사를 보며 다시 한번 그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은 무시와 혐오에 스스로 대응할 수 없다. 대응할 수 없는 이들에게 조롱, 낙인,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들은 참으로 가장 비겁하고 악하다. 어느 사회든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는 것은 언젠가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약자에게 예를 갖춤으로써 우리 모두의 인간다움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한 것 아닐까?

혐오는 그저 만만하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쏟아질 때도 있지만, 권력 가진 이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장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태원 참사는 권력 가진 이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임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이었다. 그러나 그 참사로 누가 피해자가 될지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혼자 슈퍼 보내며 가슴 졸였던 아이는 20대 초의 청년이 되었고, 그 청년이 그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 기차에서 고함소리는 홀로 여행을 시도한 그 청년을 크게 당황시키지는 못했다. 옆자리 청년은 말소리를 조금 낮추었을 뿐 여전히 졸지 않고 기차가 가는 길을 같이 확인해 주었다. 그는 나와 옆자리 청년보다 앞선 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이 약간은 어눌한 발걸음을 앞뒤에서 배려하며 말없이 내리는 문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기다리던 사람을 무사히 만날 때까지 뒤를 밟은 또 다른 승객이 분명 있었을 것 같다.

그 고함소리가 용감한 홀로 여행을 방해하지 못한 것처럼, 우연히 어이없는 참사 피해자가 된 모든 이들이 비겁한 조롱과 혐오로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고함소리는 귀에 먼저 들어오지만,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고 거센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과 애도, 분노의 물결 앞에 흔적도 없이 쓸려나가고 있다.

 

글 _ 이한숙 (이주와 인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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