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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칼럼# 여성인권

표현의 무게를 생각합니다

성희롱, 음란물, 데이트폭력, 성적 수치심….

위에 열거된 표현들에서 혹시 불편함을 느끼셨나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아니, 문제가 있긴 한가요?

지난 한 해, 소위 ‘n번방’이라 불렸던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통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이란 용어를 접해보신 분이 많으실 텐데요, 시민사회는 그간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이란 용어를 ‘아동·청소년이용성착취물’로 바꿀 것을 오랜 기간 요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6월 2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서 드디어 문제의 표현이 바뀌고 해당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습니다.

시민사회는 음란물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문제점을 보았기에 이를 ‘성착취물’이라는 용어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그리 오래 해온 것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음란’의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함’입니다.

‘음탕’은 ‘음란하고 방탕하다’라는 뜻이고, ‘난잡하다’라는 것은 ‘행동이 막되고 문란하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문란하다’라는 것은 ‘도덕, 질서, 규범 따위가 어지럽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따른다면 음란하다고 표현되는 대상에 음란함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음탕하고 난잡하다는 표현에는 음란한 것으로 규정된 대상에 대한 비난의 의미마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의 몸을 음란하다고 지칭하는 경우, 여성의 몸은 하나의 신체로 존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의 도덕과 질서, 규범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책임마저 져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 예시로 들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의 경우, 여기에 쓰인 ‘음란물’이라는 표현은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취약한 상황에 놓인 아동·청소년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함은 물론, 심지어 범죄의 피해자를 음란한 행위자로 봄으로써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되는 결과까지 가져오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어 사용 하나가 사회 전반의 인식 혹은 고정관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시민사회가 용어의 변경을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던 것이지요. 같은 이유로 언론에서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시정 권고 요청을 하는 것이고요.

 

이번에는 ‘성희롱’이라는 단어를 살펴봅니다.

성희롱의 법적 의미는 ‘상대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성희롱의 영어 표현은 Sexual harassment입니다. 말 그대로 ‘성적인 괴롭힘,’ 즉 성을 이유로, 혹은 피해자가 특정성별 그룹에 속하는 것을 이유로 괴롭히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희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니 가해자의 행위가 그렇게 중한 범죄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희롱이라는 조어에 쓰인 “희롱”의 정의를 찾아봅니다. “희롱”한다는 것은 “(1)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리거나, (2)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가지고 놀거나, (3) 서로 즐기며 놀리거나 논다”라는 의미라 합니다. 이 세 가지 의미 중 어디에도 범죄적인 의미는 없네요. 악의를 갖고 하는 행위가 아니기도 할뿐더러, 심지어 서로 즐기고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에이, 그냥 분위기 좋자고 한 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라는 대사…. 정당한 이의제기에도 웃자고 한 말인데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익숙한 그 한 마디, 가해자에게는 “그냥 장난”이었다는 면죄부를, 피해자에게는 “까칠하게 군다”라는 비난을 용인하게 하는 인식이 어쩌면 “성희롱”이라는 단어를 통해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데이트 폭력은 어떤가요?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 가해졌던 폭력이며, 법적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폭력 앞에 ‘데이트’를 붙이니, 마치 연인 사이에 사랑을 속삭이다 벌어지는 연애감정에서 비롯된 행위의 연장 같은 느낌이 들고 맙니다. 앞서 나온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범죄의 심각성을 순화시키거나, 범죄행위를 미화하고 정당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폭력은 가정에서 일어난 폭력이든, 연인 간에 일어난 폭력이든, 범죄조직 사이에 일어난 폭력이든, 그냥 그저 그대로 폭력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은 단어는 ‘성적수치심’입니다.

불법 촬영 등 성범죄 관련 판결문에 종종 등장하는 표현인 ‘성적 수치심’을 네이버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니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나 남성·여성의 육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수치를 느끼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최근 대법원은 판결을 통해 성적 수치심이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성범죄 피해자는 다른 범죄와 달리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치’의 의미를 찾아보니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낯이 없고 떳떳하지 못한 것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여야 함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피해를 본 사람이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숨어야 한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폭행 사건의 피해자는 그 어떤 수치심도 없이 응당한 분노를 느끼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데, 왜 유독 성폭행 피해자는 되려 수치스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걸까요? 고개를 푹 숙여야만 ‘진짜 피해자’이지, 당당하게 자신의 피해를 말하고 일상을 사는 사람은 ‘진짜 피해자’가 아닐 것이라는 ‘피해자다움’의 편견이 비좁습니다.

작디작은 곳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칩을 지난 봄바람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몇 가지 표현에 대한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느끼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 분이 늘어난다면, 바로 그것이 작은 변화의 시작이자, 움터오는 봄을 알리는 꽃망울이리라 믿어보고 싶습니다.

박예안

# 국제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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