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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 통신]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유감 – 한상희 (건국대 법전원 교수)


정치의 사법화

1984년 망원동 수해 소송 이후 공익소송은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게 움직여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인권이나 환경, 소비자, 여성, 장애인, 소수자 등의 문제를 사법의 문제로 변형하고 사법절차를 통해 그 이익들이 관철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사법작용은 대의제가 자칫 놓쳐버린 부분이익들이 국가정책과정에 투입되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대표강화 기능을 한다는 J. Ely의 분석은 이 점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하나의 운동방법으로서의 공익소송은 항상 이렇게 순기능만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시민운동의 사법화」라는 한계를 야기하기도 한다. 1994년 한 독거노인이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을 상대로 매월 65,000원 정도에 불과한 생계보호기준은 월 최저생계비에 훨씬 못 미쳐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제기한 헌법소원사건은 그 대표격이 된다. 당시 복지의 문제는 여전히 정치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치열한 정치투쟁을 통해 처리하여야 했던 것을 섣불리 법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복지정책을 반대하는 신자유주의 정치분파들이 아주 굳건한 참호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최근 급격한 관심을 끌고 있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라크파병 문제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치문제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헌법재판소의 각하결정으로 논쟁종결상태에 빠져버렸다. 종군위안부 등의 대일청구권 문제라든가 행정수도문제 등의 이슈 역시 정치가 해결하여야 할 사안을 헌법재판소가 덮어쓴 격이 되었다. 정치인들이 정책을 내어놓고 그에 대해 국민들의 지지와 지원을 확보하는 경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사회와 동떨어져 자기들끼리만의 정치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음은 이런 파행적 현상의 주된 원인이 된다. 그 바람에 여당은 다수결로 밀어붙이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야당이나 소수정파는 헌법재판소나 법원으로 달려가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정치적 대표를 확보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그 역시 마지막 호소의 장으로 사법부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사법화와 민주주의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의 사법화」는 법치주의의 실천이기보다는 왜곡된 민주주의의 결과이자 동시에 그 왜곡을 강화하는 이상한 불가역반응을 보인다. 물론 헌법이 보다 효과적으로 집행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보호되는 등 긍정적 효과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수많은 국가적·사회적 이슈들이 정치의 영역을 벗어나 단순한 법해석의 문제로 전락해버린 측면도 적지 않다. 정치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 앞에 세세한 내용까지 드러내며 국민들의 지지를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할 사안들이 법률관료인 9명의 재판관들의 법 해석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는 상황이 속출한 것이다. 아울러 정치의 본성인 생동성과 창조성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이다.

병역의무를 남성에만 한정한 병역법규정에 대해 여성단체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그나마 성 정치의 수단으로 헌법재판소를 이용한 경우이기에 나름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미디어법 날치기통과사건이나 긴급조치위헌확인사건 등은 사법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해결을 통해 청산해야 할 사건들이다. 치열한 정쟁을 통해 국민들의 판단에 맡겨져야 했을 사안들이 재판관과 변호사들의 법리논쟁 대상으로 전락해 버림으로써 민주적 정책결정이라는 헌법정치의 요구들이 그냥 무위로 스러져 버린 것이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권위주의의 복원이라는 모습으로 현현하기도 한다. 「정치의 사법화」라는 담론은 최근에 와서는 사법체제를 이용하여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로 변형된다. 과거 권위주의체제에서 행사하였던 폭력이라는 통치수단이 이제는 법의 형식을 빌어 사법과정이라는 통로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가 등장하게 된다. 모법의 근거도 없이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삽입한 시행령조항을 내세우며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선언한 고용노동부의 처분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미 수명을 다해가는 ‘전투적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끄집어 내어 통합진보당을 위헌정당해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는 또 다른 사례이다.

신자유주의의 침탈에 편승한 자본권력 또한 이런 「법에 의한 지배」의 틀을 활용하는 주역이 된다. 고위 법관·검사를 비롯한 전직 고위공직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영입하는 대형로펌들은 전관예우의 폐습을 넘어 대기업이나 거대자본의 숨은 로비스트 역할을 자처한다. 국가적 결정의 과정에 ‘법률자문’, ‘입법자문’ 등의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공적인 의사결정을 사유화한다. 공익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국가의 정책활동이 자신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사적 이익이 이들 로펌(및 그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사내변호사들)을 통해 법의 외피를 둘러쓰고 국가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셈이다.

결국 정치의 사법화는 민주주의의 요청을 거역하게 된다. Hirschl의 지적처럼, 주요한 국가정책을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가들이 사법과정을 통해 법적인 결정으로 대체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 내의 경제권력이나 정치권력이 사법부를 통해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산시키는 메커니즘이 구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법화의 과정에서 정치나 경제는 시민사회의 감시망으로부터 분리되고 시민들의 참여는 최소화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들’의 헌법정치를 위하여

사정이 이렇게 된다면 예의 공익소송론이나 법해석투쟁의 전략은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력의 의도에 순응하는 탈정치화의 결과만을 야기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헌법화(constitutionalisation)의 투쟁」 혹은 「헌법재판의 정치화」일지 모른다. 헌법의 해석투쟁이 아니라, 헌법의 입법투쟁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헌법에 대한 기존의 이론을 적용하고 기존의 선례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고 부정하며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우리의 헌법이론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마치 미국에서 인종분리정책을 파기하고 학교통합을 명령하였던 Brown사건(1954년)이 법리학적 고려 외에도 심리학 등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산입함으로써 새로운 헌법해석을 만들어내었듯이, 기존의 법도그마를 과감히 해체하는 창의적 입법투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작업은 적극적으로는 새로운 헌법을 창출하기 위한 개헌운동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소극적으로는 현재의 헌법에 첨예한 비판지점을 마련하고 새로운 헌법 이해를 부가하는 헌법창조운동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을 설득하기 위한 헌법변론이 아니라 그 재판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기 위한 정치변론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헌법을 총체적(holistic)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개별화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진지로 삼는 작업이다. 현재의 헌법전을 가지고도 동성애자들의 헌법과 노동자의 헌법을 각각 구성하는 것, 환경 보호를 위한 헌법해석과 공안정치 해소를 위한 헌법해석을 따로 만드는 것 등이 이러한 헌법투쟁의 방식인 것이다. 87년체제가 촉발한 민주화의 성취들을 제대로 공고화하지 못한 탓에 ‘그들’에게 빼앗겨야 했던 우리의 헌법을 이제 재탈환하고 이를 우리‘들’의 헌법정치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흑인운동이나 여성운동이 법의 틈새를 파고들어 그 속에 새로운 법의 언어를 새겨 넣었듯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그러한 법의 틈새를 찾아내어 우리의 언어로 그 속을 채워 넣는 막중한 작업, 그것이 바로 당대가 요청하는 헌법정치의 복원이다.

 

글_한상희(건국대 법전원 교수 / 공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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