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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턴활동기 – 모의배심재판 방청기

공감 인턴활동기

모의배심재판 방청기

김병필 인턴_아름다운재단 공감

안녕하세요. 저는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김병필 인턴입니다. 공감의 변호사님을 통해서 모의배심재판을 전해 듣고 다른 인턴들과 함께 재판을 방청했습니다.
저 역시도 이 글을 읽으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배심 재판을 과연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도입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배심 재판을 도입해도 잘 정착할 것이라는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나아가 반드시 도입되어야 할 거라는 생각도 함께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보고 들은 모의배심재판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에게서 우리나라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자백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경찰이나 검찰에서는 자백을 했는데, 공판정에 나와서 태도를 바꿔서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 말입니다.
우선 검사님의 표정이 무척 일그러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고인에게 소리를 치신다고 합니다. “왜 예전에 자백해 놓고 말을 바꾸는 거야!” 공판검사와 수사검사가 나뉘어있는 현 제도하에서는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면 자백사건에 비해서 일이 몇 곱절로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판사님의 표정 역시 좋지 않다고 합니다. 자백사건이면 간이공판절차로 넘어가서 간단하게 형량만 정하면 될 것을, 피고인이 말을 바꿨기 때문에 일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닙니다. 피고인은 이제 “반성의 기색”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형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불이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피고인은 왜 긁어 부스럼 이지.’ 하지만 놀라운 것은 사건을 맡은 변호사 역시도 피고인에게 인상을 쓴다는 점입니다. 준비해 온 것이라고는 “피고인은 어려서부터…”로 시작하는 탄원서 밖에 없는데, 이제 사건 기록을 새로 다 검토해야 합니다. 물론 형이 더 늘어나게 될 것 같아 걱정이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만, 어느 쪽이 더 클 지는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제4항에는 엄연히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라고 나와 있기는 하지만,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는 순간 법조 3륜 모두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사실상 ‘유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법 실무를 하는 법률가들의 편의와 피고인의 권리는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많은 제도들이 시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제도들이 시행되겠지만, 그렇지만 법률가를 제외한 온 국민의 마음 한 켠에는 이런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판검사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죄 지은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지만 모의배심재판을 통해서 본 모습은 그러한 상식과는 한참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선 검사님과 변호사님 모두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하여 매우 충실하게 준비해 오신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검사님은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변호사님은 그 입증을 깨뜨리기 위해서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왜 배심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 되는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서 서로 치열하게 다툴 때에야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검사님과 변호사님 모두가 준비해 오신 입증 계획 자료입니다. 그 자료를 보니 사전에 쟁점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 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료를 통해서 검사 측과 변호인 측 사이의 쟁점이 무엇인지를 배심원에게 우선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쟁점에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어떤 것들이 있는 지 한 눈에 정리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배심원들의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이번 모의재판에서는 연예인들로 구성된 문화예술인 배심원단이 있었습니다. 저는 연예인들 사진 찍느라 바빴는데, 참여하신 배심원들은 연예인들은 안중에 없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법정은 방청객과 기자들로 가득 찼고, 촬영용 조명이 많아서 실내는 무척 덥고 공기도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변론을 충실히 듣고 있었습니다.

재판은 법관에게는 단 한번의 지나가는 사무일 뿐이지만, 피고인에게는 일생이 걸린 중대한 순간입니다. 모든 판사님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열심히, 또 성실히 재판에 임하시겠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한계가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비슷한 사건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판사님들도 변론을 듣다가 겪어 본 사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 지난 사건과 같은 결론을 내려 버리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이 피고인에게 일생이 거린 중대한 순간이듯이, 배심원 각자에게도 일생에 있어서 자주 찾아오지 않는 큰 사건일 것입니다.

이번 모의 배심재판의 사안은 평소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술에 취해 자신을 때리던 남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검사와 변호인 간의 쟁점은 크게 봐서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살인죄의 성립여부와 관련해서 “살인의 고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폭행치사죄의 성립여부와 관련해서 “정당방위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 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검사님과 변호사님 모두 양 쟁점에 대해서 여러 증거와 정황 사실을 제시하면서 배심원들을 설득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첫 번째 쟁점과 관련해서는 검사 측은 피고인이 범행 직후 ‘보자기를 피해자의 목에 두르고 X자로 목을 졸랐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수사 경찰의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을 조르면서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는 점도 중요한 정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목을 졸랐다고 추정되는 30초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직접 30초를 세시면서 보여주셨던 장면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변호인은 목을 조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보자기로 목을 눌렀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범행 직후의 피고인의 증언은 수사 경찰의 일방적 질문에 의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범행 재연 때 취했던 동작의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목을 조른 것이 아니라는 피고인의 주장을 뒷받침했습니다. 또한 피해자가 중증의 알코올 중독이었다는 증거를 제출하시면서 알코올 중독자의 경우 일반인에 비해 쉽게 사망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이렇듯 ‘살인의 고의’ 라는 하나의 쟁점을 놓고 검사 측과 변호인 측 모두 많은 증거와 주장을 펼쳤습니다. 정말 판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살인의 고의의 인정 여부에 대해서는 배심원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되었습니다. 바로 검사가 살인의 고의의 존재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판결을 내리신 판사님들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직업법관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고 또한 그 판단 역시 신빙성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두 번째 쟁점과 관련해서는 사실 인정의 문제가 아닌 법적 판단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증거를 놓고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법리에 대한 다툼이 치열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검사님께서는 정당방위에 대한 이제까지의 판례 태도를 배심원들에게 풀어서 설명 하셨습니다. 정당방위의 요건인 침해의 현재성이나 정당방위의 사회윤리적 제한과 같은 형법상의 요건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살인사건의 80%는 부부나 연인 사이에 발생한 것인데, 이제까지 정당방위가 인정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변호사님께서는 기존의 판례의 태도를 비판하시면서, 매맞는 아내에 대한 심리학적 조사 결과 등을 인용하셨습니다. 매맞는 아내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결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행위는 수년간에 걸쳐 지속되어 온 폭행에 대해서 저항하지 못하면서 지내다가 단 한번 힘을 내어 저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약자들의 자기방어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살인의 고의를 인정할 것이냐는 문제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개인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주변환경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의재판을 보고 나온 방청객들도 제각기 생각이 달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사실 전문법관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김보은양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판례의 태도에 대해 형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정당방위를 인정할 것인지를 놓고 많은 다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시간제한 때문 이었는지 아니면 쟁점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인지 만장일치의 결론을 낼 수 없었습니다. 문화예술인 배심원단의 경우 정당방위를 인정한 분이 2분, 인정하지 않고 폭행치사를 인정한 분이 7분이었습니다. 일반인 배심원단은 정당방위를 인정한 분이 4분, 인정하지 않은 분이 5분이었습니다.

생각에 따라서는 이런 문제가 바로 배심원들에게 법적 판단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인으로서 법적 판단을 하기가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정당방위와 같은 위법성 조각 사유는 궁극적으로 “일반인이 그러한 입장에 있었다고 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 라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전반의 여론의 변화나 배심원단의 구성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심원단 간의 의견이 달라 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배심원의 판단을 신뢰하기 힘들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위법성 조각사유의 판단이 쉽지 않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배심재판이 현실에 적용될 경우 발생할 문제점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정당방위의 판단과 같이 배심원단의 구성에 따라서 의견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경우, 배심원 선정의 공정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번 모의재판의 경우에도 오전에는 배심원 선정절차가 이루어 졌습니다. 앞으로도 배심원 선정에 있어서 어떻게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경험이 누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듯 검사 측과 변호인 측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싸우는 경우 얼마나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새로운 형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배심재판에 국선변호인을 선임하도록 되어 있는 이상, 이러한 문제점은 오히려 국선변호인 제도를 더욱 확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피고인의 재판 받을 권리가 제대로 인정되지 못하고 사실상 ‘유죄추정’의 형태로 이루어 지고 있는 형사 재판의 현실 속에서 배심제, 참심제의 도입은 매우 긍정적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 모의재판은 우리나라에 배심 재판을 도입할 경우, 잘 정착할 것이라는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제도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배심제, 참심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해 나가야 할 제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법원행정처, 대검찰청, 대한변호사협회와 공동 개최로 4월 12일(수)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민참여 형사모의재판에 대한 방청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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