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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이 권하는 책] 법 밖을 보는 눈 – 정정훈 변호사

 


 


1.


   소설가 김훈은 “법전은 어휘의 보고”라고 한다. 형용사, 부사 없이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된 글을 쓰고자 한다는 김훈의 절제된 문체를 감안하면, 그가 법전을 가까이에 두고 글을 쓰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의 언어가 매력적인 이유는 화려한 수식어를 철저하게 배제한 ‘건조함’이 역설적으로 풍부한 수사적 ‘여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어와 동사만으로 빽빽하게 짜인 문체의 ‘여백’은 그 어떤 화려한 형용사, 부사보다 더 많은 느낌과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법전은 전형적으로 형용사, 부사가 철저하게 배제된 건조한 언어의 구조물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문서보다도, 법전에는 뜨거운 형용사, 부사들이 생략된 채로 우글거리며 웅크리고 있다. 법전은 우리들 삶의 한숨과 분노, 피와 눈물을 명사와 동사, 조사만으로 차갑게 기록한다. 법전은 자유의 “피 냄새”를 씻어낸 채 깔끔하지만, “역사의 진보에는 단 한걸음도 공짜가 없다.” 그러므로 ‘법의 해석’은 법전에 기록된 명사와 동사를 해설하는 작업이 아니다. 법전에 생략된 무수한 형용사와 부사를 채워 넣으며, 차가운 법전을 뜨겁게 달구는 일이어야 한다. 법전에 기록된 작은 승리와 큰 패배를 통해서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일이어야 한다.


 


   저자 김욱 교수는 “‘법을 보는 눈’은 ‘법 밖을 보는 눈’에 의해서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미건조한 법전에 마음을 적셔주는 빗물이 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법전의 미로를 벗어나, 법과 현실 사이에 길을 만들고 있다.



 


2.


   사랑의 삼각관계가 연애의 전형적인 트라우마인 것처럼, 법-정의-권력의 삼각형에는 불안과 질투,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라는 전형이 잠재해 있다. ‘사랑의 지배’ 혹은 ‘사랑을 빙자한 지배’를 경계하듯, ‘정의를 가장한 권력’과 ‘법의 지배’마저도 항상 경계하여야 하는 이유다. ‘사랑’에 눈멀어 ‘사람’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듯, 법에 눈멀어 정의와 권력의 긴장을 살피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사랑으로 관계를 구속하는 일이 ‘사랑의 거짓’이듯이, 삶을 살핌으로써 법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법으로 삶을 강요하는 ‘법의 지배’도 거짓이다. 


 


   ‘법’의 언어로 정의(justice)를 드러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법과 정의 사이의 간극’이라는 고전적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언어의 제한성에 기인다. 법을 통해 정의를 발견하려는 부단한 ‘해석의 노력’은, 어쩌면 언어라는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의 형벌’이다.


 


 


3.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계약의 자유’가 실현되는 ‘계약의 부자유’한 사회적 현실“에서 법은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면서 실질적인 부자유와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법은 ”자신을 부정하는 양심의 도전에 대해서 모순적으로 타협함으로써“, ”내성을 기르는 자본주의 헌법체제의 정교한 자기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트라시마코스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적 한계 속에서 변화하는 정의“의 가능성을 신뢰한다. 일차적으로는 기득권적 사실관계가 법규범을 발생시키지만, ”법규법이 기득권적 사실관계를 변화시키는 이차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긍정한다. 법은 강자의 의지만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의지도 모순적으로 반영된다. 저자는 이 ”해결 불가능한 모순“의 돌덩어리를 굴리는 것이야 말로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저자에게 이 모순의 돌덩어리를 굴리는 일은 ‘시지프스의 형벌’이기보다는, 계속해서 “다시 한 번 더!“를 외치는 니체식 긍정의 주사위 놀이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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