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자원활동가의 활동] ‘공감 격차’는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한다 –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읽고
사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에게 질병과 만성적인 고통이 찾아오기 쉽다는 점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궂은 일일까? 어디까지가 궂은 일일까? 보통은 까마득한 높이의 중장비 사이에서 땀 흘리는 건설 노동자들이나 화학약품에 쉽게 노출되는 제조업 노동자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지나치는 마트 계산원, 콜센터 상담원, 심지어 교사들도 노동 때문에 정말 물리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을 때, 여기에 바로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생명학자 캐런 메싱의 저서 <보이지 않는 고통>은 지금까지 과학계의 논의에서 소외되어 왔던 여러 직종의 여성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고, 이들을 위해 저자가 해왔던 연구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간다.
저자는 노동자들과 직업보건에 관한 연구를 직접적으로 시작하면서 ‘인간공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된다. 인간공학은 노동자들의 작업을 관찰하고, 그들이 어떤 자세로 일하고, 무슨 동작을 반복하고, 왜 그런 방식을 택해서 일하고 있는지를 샅샅이 측정해 노동자들의 건강에 미치는 위험을 알아내는 학문이다. 파리의 한 기차역 청소 노동자들의 업무 환경을 관찰하며 인간공학에 발을 담그게 된 저자는 연구 끝에 큰 슬픔과 의문에 빠진다. 분명 그저 청소도구를 담고 다니는 들통 하나만 바꿔도 청소노동자들의 허리 건강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음에도, 그 어떤 변화도 목격하지 못한 것이다. 경영진과 관리자들에게 노동자들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주 관심 분야가 아니다. 이익과 연결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반 대중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은 늘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가게는 24시간 편의를 제공해야 하지만, 그것을 해낸 노동자들은 투명인간이다.
노동자들의 건강상 피해가 더 가시적인 경우에는 어떨까. 저자가 막 교수 일을 시작한 1980년, 그는 방사선 분진에 노출된 제련 노동자들이 유전자 손상을 겪고 있고, 심지어 손상이 그들 자녀들의 건강에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아낸다. 사고성 노출에 대한 증거가 확실했음에도 그들은 공장에 맞선 재판에서 이길 수 없었다. 판사들이 과학적 인과관계가 충분치 않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었다. 공장 측 변호인들과 이들에게 자문한 과학자들, 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모두 기형아를 출산할지 모른다는 부모의 불안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본인의 직업 때문에 자녀가 아플 것이라는 두려움에 공감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공감 격차’라고 명명한다. 노동자들의 작업을 지켜볼 기회도, 그럴 의지도 없었던 판사와 과학자들은 이들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계층의 문제에 공감한다. 과학자들이 식당 직원들보다 박물관 방문객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들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박물관 피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당 직원들에게 의자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는 연구는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공감격차는 결국 계층 간 단절을 부른다. 노동자의 고통을 헤아릴 생각이 없는 전문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것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느냐’이다. 눈에 보이는 위험과 극적인 사고들은 산재를 입증할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매일 몇백 번씩 반복되는 동작들이 점차 관절에 미치는 영향이나, 기록되지 않은 추가적인 근무 시간을 고려하는 것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지’ 않다고 여겨질 뿐이다. 수치로 표현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고통은 자연스레 평가절하되고, 심지어 노동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판정을 받는다.
저자와 같은 양심적인 과학인들은 우리 사회가 공감격차를 넘어서는 데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결국 공감격차를 해소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그리고 더 ‘평등한’ 발언권이 주어져야 한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노동자가 고용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기에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져야 한다는 점이다. 정보적 격차 역시 고려해야 한다. 전문가를 고용해 본인의 주장을 입증할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고용주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이 모든 계층 간 격차가 발언이 갖는 무게와 신빙성을 다르게 만든다.
소통은 이해를 부르고, 이해는 공감을 부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은 이미 아우성치고 있다. 귀를 닫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 생각해 볼 때이다.
글_오혜민 (공감 41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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