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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성소수자# 차별

가구넷 X 행성인 “찬란한 유언장” 행사

“유언장 써두고 싶어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아서 갑자기 죽는다면 큰일 나요..”
“법적인 결혼제도에 들어가지 않을 예정인 저의 경우, 기존에 통용되는 절차와는 다르게 적용될 것 같은데 그 방법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죽음을 내 뜻대로 정할 순 없지만 내 장례식만큼은 내 맘대로 하고 싶다.”
– “찬란한 유언장” 행사 참가자들의 참여 동기

지난 10월 28일,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가구넷)’와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행성인)’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커뮤니티 교육 프로그램 3탄 ‘찬란한 유언장 행사’가 행성인 사무실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대면으로 진행된 모임에 18명이 참여했다.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도 다양하고, 연령대도 20대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찬란한 유언장” 행사의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지금의 ’가족구성권연구소‘ 전신)’이라는 상당히 긴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는 연구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임종을 앞두고 작성되는 유언장이나, 죽음을 상상하며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로서 유언장을 작성해보는 행사들과 달리, 가구넷에서 진행하는 “찬란한 유언장” 행사는, 동성커플이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방법을 교육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시작됐다.

현행법에서 파트너로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동성커플의 경우, 혼인․혈연 중심의 법정상속 제도로 인하여 불의의 사고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법률관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언장이 없으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과 실제 사례들, 유언장 작성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현행 법제도의 차별적인 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혼인평등과 가족구성권 보장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늘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동성커플의 경우에,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이 없다면, 한 사람이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하였을 때, 생존한 파트너는 법정 상속제도에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 배우자나 자녀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상속권이 인정이 되는데, 명의자가 사망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경우, 함께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나거나 함께 모은 재산에 대해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가 없다.

공감에서 실제로 지원했던 사건 중에도, 30대 레즈비언 커플이 교통사고로 한 명이 사망하였는데 생존한 파트너가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락을 끊고 살던 유가족으로부터 함께 살던 집에서 물건을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절도죄로 형사고소를 당하는 기가 막힌 일이 있었다. 변호인으로서 경찰조사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고 절도 피의자로 경찰서에 앉아 있는 의뢰인을 보며, 너무나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유언장을 작성해두는 이유는 이러한 비극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유언장을 작성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법정 상속인들이 유류분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고, 배우자로서의 세금혜택도 받을 수가 없다. 특히나「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장례 주관이나 시신인수의 권리가 법적 배우자나 직계존비속이 우선하기 때문에, 동성 커플의 경우, 파트너의 장례식에서 조차 지위를 보장받지 못할 때가 있다. 운 좋게도 생전에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인정받은 경우, 혈연가족의 배려로 파트너로서 자리를 지킬 수 있겠지만, 이것은 당연한 권리가 아닌 가족의 선의에 의존한 것으로 당사자로서는 너무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성 커플들은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만 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들을, 동성커플들은 상속 문제는 공증 비용을 들여서 유언장을 작성해둬야 하고, 파트너가 질병이나 노령으로 의사결정이 어려울 때 보호자나 대리인으로서 권리가 없으므로, 임의후견제도를 통해 대비하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심각한 차별이 아닌가.

사후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측면에서, 유언장을 작성해 두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불평등한 혼인제도로 인하여 자구책으로 유언장을 작성해둬야 하는 동성커플들의 상황은, ‘찬란한 유언장’ 행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을 무겁고 씁쓸하게 만든다. 여전히 이 나라에서 나는 동등한 시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장서연

# 빈곤과 복지# 성소수자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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