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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칼럼# 혐오

혐오의 씨앗을 뿌리는 일

도널드 트럼프(이하 ‘트럼프’)가 당선되던 2016년 11월 8일. 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어느 카운티에 살고 있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주의 어느 카운티라 하면 경기도의 어느 시와 비슷한 개념인데 카운티의 경계선을 따라 대선에서 제가 살았던 카운티는 힐러리를 그 너머는 트럼프를 지지했습니다. 트럼프가 당선 된 그 다음 날 아침 장을 보러 카운티의 경계선을 건너 한인마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날만큼은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평소처럼만 지나갈 수 있기를 조용히 빌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침묵 속에서 제가 느꼈던 두려움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지금 당장 현재 여기에 있는 나의 안위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요즘 미국 내에서의 아시아인 혐오 범죄에 대한 뉴스를 들으면 저는 6년 전 그 날을 떠올립니다. 어쩌면 그 때부터 혐오의 씨앗이 이미 자라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대선 결과가 발표된 이후 그 결과에 대하여 무너져가는 미국 제조업의 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노동자를 더 이상 대변하지 않는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반발이라고, ‘전통적인 미국’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의 결집이라고. 그리고 박탈감을 느끼는 미국 농촌인구의 분노를 담은 것이라는 등의 다양한 분석들이 언론을 통해 줄줄이 쏟아졌습니다.

위기도 반발도 결집도 분노도 모두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닥친 경기침체와 이후 심화된 양극화를 헤쳐 나가야 했던 미국인들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난한 어려움에 대한 반응으로 풀이됐지만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에 대한 손가락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하였습니다. 그 중 일부는 일자리를 뺏어가는 미국 내부의 이민자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미국을 위협하거나 미국에 의존하는 외국인들에게 향했습니다. 트럼프는 발 빠르게 이민자,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대선 기간 동안 대대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직무 수행 중에도 코로나가 미국에서 급속도로 퍼지자 다시 아시아인 그 중에서도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부치기는 발언을 일삼았습니다. 트럼프가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들 그리고 SNS 계정을 통해 한 발언들 중 일부는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낭설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막말들에 대한 비판을 한 자들에 대해서는 ‘정치적 올바름’ 공격이라며 날을 세우며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정작 미국국민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트럼프가 비록 거칠더라도 자신들의 마음과 진실을 대변하는 ‘사이다’식의 발언을 하는 것이며, 그의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벼운 말들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막말은 절대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의 이주민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혐오 정서와 각종 음모론들을 사회 공론장에 등장 시켰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발언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는 익명의 힘을 빌려 발화해야만 했던 혐오 발언들이 다시금 대통령의 얼굴을 가지고 미국 미디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2016년 대선과 트럼프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진보와 보수, 농촌과 도시의 경계를 넘어 혐오의 대선이자 혐오의 대권이기도 했습니다.

2016년의 어느 날, 집을 나서면서 두려움을 느꼈던 이유는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 정치 공론장에서의 유색인종 혐오가 암묵적으로 승인 내지 최소한은 묵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렇기에 뽑았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뽑았지만, 이민자와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자극하는 것은 트럼프의 주요한 정치 전략의 한 부분이었고 미국 시민들은 그러한 대통령이어도 안고 갈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누군가의 일상이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악의를 가진 한 사람의 노력과 그 사람이 자신의 악의를 키울 수 있도록 그 악의가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사회의 용인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그의 말을 통해 2016년 대선 과정, 그리고 그 이후 대통령으로 집무를 보던 4년 동안 미국의 대통령으로써 누리는 공적 발언대를 통하여 이주민과 외국인을 향한 각종 악의적인 혐오와 편견 그리고 낭설들이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 정당한 발언으로 인식되게 하였습니다.

혐오를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트럼프를 뽑은 모두가 유색인종을 혐오하지 않다는 것을 알더라도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을 지옥으로 만들 사람은 백 명을 만나든 만 명을 만나든 단 한 명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만큼 정치인의 어떤 집단을 표적으로 한 발화는 그 어떤 순간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그 집단을 짓누르고 위험에 빠뜨리는 혐오의 씨앗이 됩니다.

미국의 2016년 대선을 가로지르던 경제의 문제도, 박탈감의 정서도 모두 혐오 없이 논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하는 공정의 문제, 주거의 문제, 박탈감의 정서 등도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고도 논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어떤 집단에 대한 비난은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는 것이 아닌, 그저 갈 곳 잃은 분노의 분출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는 것이 ‘사이다’여야지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사이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콕 집어 원초적인 비난을 일삼는 행위는 “단순한 갈라치기가 아닌 혐오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준 것뿐이라고요? 누군가의 혐오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일상을 앗아가기도 하는,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말들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일상이 공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강은희

# 취약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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