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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위하여 _ 황필규 공감 변호사

[공변의 변]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위하여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것,그리고 권리를 권리로 본다는 것  

황필규 공감 변호사

   회와 시위에 관련된 논란은 참 진부하게 느껴진다. ‘폭력집회’, ‘시민들의 불편’, ‘법질서의 확립’ 등등 관련된 표현들도 참 지겹도록 들은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평화로운’ 집회와 ‘폭력적인’ 집회의 이분법에는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집회가 열리기 전에 사전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면 특히 그러하다. 법무부의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은 ‘민주적 공동체가 기능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기본권인 집회, 시위의 자유가 과도하게 제한받고 있다는 주장’과 ‘일반 국민의 피해가 심각하여 집회, 시위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익충돌 시 집회, 시위의 자유와 공공의 안녕질서를 합리적으로 형량하여 집회, 시위를 관리’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집회, 시위와 관련된 앞으로 5년간의 ‘인권’정책계획이라는데 아무리 뜯어봐도 ‘관리’계획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과연 정부는 집회, 시위의 자유의 의의를 제대로 인식하고는 있는 걸까.      

  집회, 시위의 자유가 ‘민주적 공동체가 기능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기본권’이라는 점은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안이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이 권리는 ‘국가권력을 비판하고 국민의 의사를 여론화하고 이를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집회를 통하여 국민들이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집단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여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집회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민주적 공동체가 기능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근본요소에 속한다.”고 하여 그 의의를 명확히 하고 있다. 논의의 전제로서 이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으면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여론의 형성’을 위한 ‘민주적 공동체의 불가결한 근본요소’가 행사되는데 정부나 언론이 우선적으로 그 형성하고자 하는 ‘여론’의 내용은 무시한 채 그 형식만을 문제로 삼는다면 이미 이 기본권의 최소한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일반 국민의 피해’를 이야기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개인이 집회의 자유를 집단적으로 행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반대중에 대한 불편함이나 법익에 대한 위험은 보호법익과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 국가와 제3자에 의하여 수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헌법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집회, 시위의 양상을 논하기 이전에 표현의 자유와 집회, 시위의 자유가 그 행사를 통하여 여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형식적, 실질적으로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지, 정부는 얼마나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우릴 자세가 되어 있고 실제로 수렴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여론의 수렴을 통한 국민의 공감대 형성 없이 정부는 한미FTA 체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언론은 “법정스님이 FTA를 반대하는 것은 정부가 홍보를 제대로 안한 탓”이라는 식으로 언로를 차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존권이 직결되어 있는 이해당사자들의 집회, 시위의 양상만을 논하는 것은 인권의 관점, 더 나아가 헌법적 관점이 모두 결여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평화적인 집회는 보호되어야 하지만 불법폭력집회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집행만이 해법이라며,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과 부상당한 경찰의 수를 언급하는 논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비껴가고 있다. 지극히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회, 시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 그 집회, 시위는 평화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집회, 시위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그 국가의 사회적 의사결정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집회, 시위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국민들의 의사를 수렴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부의 탓이지 달리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할 수 없는 집회, 시위의 참가자들의 탓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경찰들의 부상은 집회 등을 금지하고, 제한하고, 이를 강제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지 집회, 시위와 무관한 경찰들에게 의도적인 폭력이 가해진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주요시설에 대해서는 그 경비가 필요하겠지만, 집회, 시위를 정부가 막으려 들지만 않았어도 이러한 부상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법은 분명히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확실하게 못 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도 스스로 한계가 있어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실상 사전허가제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금지통고제도를 합리화시키고 있다.

  최근 소위 ‘원천봉쇄’와 관련된 판례 몇몇이 눈에 띤다. 수원지방법원(양환승 판사)은 “집시법의 취지는 단지 계획된 집회가 위법하거나 신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참여를 사전에 봉쇄하고자 함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조화로운 해석”이라고 판시했다. 한편, 청주지방법원 제천지원(신용석 부장판사)은 “집회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데다가 … 경직법은 경찰관이 범죄예방을 위해 관계인에게 경고를 발하고 나아가 그 행위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그 범죄행위의 명백, 현존성과 중대, 긴급성을 요건으로 요구하고 있으므로, … 현실적 필요성과 효과성만을 이유로 집회참가자에 대하여 각 지역에서 출발을 제지하는 이른바 원천봉쇄라는 경찰관의 직무집행이 적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위 제천지원 사건의 항소심에서 대전고등법원(김상준 부장판사)은 그 결론을 달리하고 있다.
“이 사건 집회가 정부당국으로부터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하고 교통소통을 위해 제한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금지통고된 점, 피고인 등이 제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의 출입로 봉쇄에 대해 피고가 배수로 철 구조물을 던져 경찰 지프차 뒷유리창을 파손한 점, 피고가 불법집회에 참가할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고 그에 따라 상경을 위해 승합차에 탑승한 점, 집시법 위반 등의 범죄행위를 저지를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점 등을 감안, 원천봉쇄 조치는 적법한 경찰권발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는 합목적적인 해석이다.”

  정부의 태도와 이에 대한 일부 법원의 태도는 집회 등에 대한 허가제 원칙을 적용하는 위헌적인 발상을 뛰어넘어 그 “예비”행위까지고 처벌하거나 제지할 수 있다는 초법적인 접근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퇴근시간, 기업관계자를 만나러가는 검사, 변호사를 만나러가는 판사, 접대를 받을, 즉 뇌물을 받을 명백, 현존하는 위험이 있으나 검찰청과 법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를 분노하고 슬프고 답답하게 하는 것은 단지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정부의 집회 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위험하지만 법에 규정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는 수준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집회시위의 자유가 예정한 소외된 의사의 표현과 의사결정에의 반영이라는 목적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것, 권리를 권리로 본다는 것. 너무도 당연한 것이 다수, 힘 있는 자의 억지논리와 궤변으로 부정될 때, 그 사회는 죽은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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