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기고] 종이호랑이 대신, 강제실시를: 의약품 강제실시의 필요성 – 홍지


 


지난 5월 7일, 보건복지가족부에서 백혈병치료제 스프라이셀(sprycel)의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 네 번째 약제급여조정위원회가 열렸다. 2008년 1월 14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스프라이셀을 생산하는 다국적 제약회사 BMS(Bristol-Myers Squibb) 간의 협상이 결렬됐다. 그리고 3월 14일 첫 번째 조정위원회가 열린 이후 이미 2달 가까이 지난 이 날, 스프라이셀의 약값은 한 캅셀에 55,000원이라는 경이로운 가격으로 결정됐다. 성인 하루 복용량이 두 캅셀이니, 백혈병 환자들은 하루에 11만원, 1년이면 약 4천여만 원에 달하는 약값을 감당해야 한다. 조정위원회의 이성환 위원장은 이 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5,000원은 “제약회사가 공급을 거부하지 않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이야기 했다.


 


스프라이셀은 2006년 약제비 절감을 위해 새로운 약가결정방식인, ‘포지티브 리스트’가 도입된 이후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제약회사 간 약가 협상이 결렬된 첫 번째 사례다. 포지티브 리스트란, 효능이 우수하거나 경제성이 좋은 약을 선별하여 보험급여를 인정해주는 제도이다. 국내 판매를 위해 허가를 받은 의약품은 공단과 제약회사 간의 약가협상을 통해 약값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 간 약가협상이 실패하면, 의약품은 복지부 산하의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서 심의조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제약회사가 조정위원회의 결과에 불복하여, 약을 공급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으나 복지부는 “직권으로 해당 약을 보험에 등재시킬 수 있다”고만 이야기 했다. 그러나 이성환 위원장의 인터뷰 발언은 복지부의 ‘직권등재’가 제약회사의 공급 거부 앞에서는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Fuseon)은 제약회사 로슈(Roche)가 고시된 보험약가에 불복하여 끝내 공급 거부라는 파국으로 치달은 약이다. 2004년 식약청의 시판 허가를 받았으나, 벌써 4년 째 한국에서는 푸제온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정부는 푸제온의 보험가격에 대해 로슈와 입장 차이만 수차례 확인할 뿐, 아무런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푸제온 공급의 유일한 해법은 로슈가 원하는 약값을 인정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에이즈 치료제 평균 가격의 2배를 훌쩍 뛰어넘는 푸제온의 가격은, 질병에 대한 편견 때문에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에이즈 환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 때문에 푸제온은 “환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공급 되어야 한다.”


 


푸제온과 스프라이셀의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난 제약회사의 횡포는 의약품의 독점 공급과 독점 판매에서 비롯되었다. 의약품 생산에서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제약회사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이유는, 바로 특허이다.


 


특허는 발명의 개발자에게 경제적 보상을 줌으로써 개발자의 창작 의욕을 높이고, 좀 더 많은 기술의 확산과 보급을 촉진하여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정책적으로 반영된 제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보상이란, 바로 특허를 부여받은 과학기술의 생산, 판매, 양도 등 모든 실시에 대해 20년 동안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독점’이 목적 범위를 벗어난다면, 그 수단에 대한 제재조치 또한 필요하다. 푸제온의 공급 거부 사태는 제약회사가 자신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기술의 확산과 보급을 촉진’이라는 특허법 본래의 목적을 거스른 것이다. 그래서 ‘세계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을 비롯하여 각국의 특허법에는 이를 제재하기 위해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라는 제도를 마련해 놓았다.


 


어떤 약을 생산할 수 있는 제약회사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상 만인의 의약품에 대한 경제적 접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약값은 협상을 통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만들도록 해서 저절로 내려가게 해야 한다. 때문에, 정부가 자국민에게 진정으로 의약품을 공급하고자 한다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강제실시를 발동해야 한다. 설령 제약회사가 자율적으로 약값을 내린다하더라도, 제약회사가 여전히 독점생산과 독점판매를 한다면 필요한 양을 자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로슈가 독점 생산하는 또 다른 약으로, 조류독감의 유일한 치료제인 타미플루(Tamiflu)가 있다. 지난 2005년 전 세계적으로 타미플루에 대한 강제실시가 논의가 되자, 로슈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가격을 인하하였다. 그러나 현재 로슈의 생산능력으로는 타미플루에 대한 전 세계적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 우리나라 역시 세계보건기구(WHO)의 권장량인 ‘전체 국민의 20%’에 턱없이 못 미치는 2%, 즉 120여만 명 분의 타미플루만 비축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약회사가 약값을 내린다 하더라도 위기는 지연될 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제실시는 그 자체만으로 약값을 떨어뜨리고, 약물의 안정적 공급을 향상시켜, 의약품에 대한 민중의 통제력을 강화시킨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강제실시를 발동하면, “‘한국은 특허권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로 낙인이 찍혀서 제약회사들이 앞으로 한국에서 약을 공급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강제실시를 가장 많이 발동하는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의약품 시장인 미국과 캐나다라는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강제실시가 특허권의 침해라고 생각하는 복지부의 인식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강제실시는 특허권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특허를 실시하는 사람을 특허권자가 고소할 수 없도록 소극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며, 특허권자는 자신의 권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강제실시권자로부터 대가 즉, 로열티를 받게 된다. 복지부는 이러한 소극적 허용마저도 못하겠다는 것이다.


 


2007년 태국 정부는 에이즈 치료제 칼레트라(kaletra)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동했다. 이에 반발하여 태국 내 시장 철수를 선언했던 제약회사 애보트(Abbott)는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결국 칼레트라의 가격을 절반 수준으로 낮춰서 판매하겠다는 발표까지 했다. 물론, 태국 정부는 애보트의 이런 회유에도 불구하고 강제실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태국 정부는 에이즈 치료제 비용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비단 환자들의 치료접근권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건강보험재정 문제로 지난 삼십여 년 간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는 복지부가 언제까지 “태국은 우리와 다르다.”라고 외면할 지 지켜볼 일이다.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