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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변의변]얼굴공개논쟁, 인권이라는 불편한 노력-정정훈 변호사

나는 자칭 ‘인권변호사’다. 강 씨의 얼굴이 공개되자 몇몇 언론에서 변호사의 ‘코멘트’를 따기 위한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처음에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라고 버텼다. 그러나 질문이 반복되고,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렇게 인터뷰를 하고, 토론회에 참여하고, 신문에 기고도 했다.


 


 


얼굴 공개 논쟁, 어쨌든 중요하다 


 


용산참사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같은 사무실의 동료 변호사는 “강 씨가 결과적으로 용산도 죽이는 것 아니냐”며 언론의 관심이 너무 쉽게 용산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우려했다. 동의했지만, 연쇄살인범 강 씨의 문제도 인권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공론화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국 청와대 행정관의 이메일 지침이 사실로 드러났다. 청와대에 낚여, 저들의 프레임에서 놀아났다는 자괴감이 없지 않다. 청와대 이전에, 일부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갇혔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있다.


 


집권 여당은 얼굴 공개 논쟁이 사회적으로 수렴되기도 이전에, 흉악범죄자 얼굴 공개법 제정으로, 사형 집행으로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표를 읽는 그들의 예민한 후각이 느껴진다. 그러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다만 청와대나 보수 언론의 프레임에 갇힌 제한적인 논쟁이 되지 않으려면 더 깊은 근본을 캐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무엇이 인권이고, 인권이 문제 되는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대답해야 한다. 언론과 인권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의 낚시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얼굴 공개를 둘러싼 논쟁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


 


 


시민의 법 감정에서 출발하여


 


초기 95%에 가까운 여론의 지지는 안타까운 현상이었다. 법률가들의 경우는 찬반이 팽팽하다며 전문가 의견을 시민들의 여론에 대립시켜 의미를 축소하는 방식은 부당하다. 그것은 엘리트주의로 가는 쉽고, 나쁜 길이다. ‘대중’을 적극적으로 사고했던 혁명가 그람시는 “상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상식에 기초를 두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중의 상식의 뿌리로부터 나와, 상식의 껍질을 깨고, 그것을 다시 상식화하는 것.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진보라 부른다. 


 


우리 사회가 공들여 도입한 국민참여재판도 국민의 건전한 법 상식을 신뢰한다는 제도적 확신의 표현이다. 얼굴 공개에 대한 시민의 법 감정을 사회적 관음증으로, 과격한 분노의 왜곡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토대를 허무는 자기부정이 되기 쉽다. 결국 현재 시민의 법 감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95%의 여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이 우리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가? 어떻게 시민들과 함께 합리적인 상식을 만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사회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 희망의 언어를 ‘인권’에서 찾고, 사회적 소통을 어렵게 하는 문제의 원인이 일부 ‘언론’에 있다고 진단한다. 


 


 


관계로서의 인권을 말하는 어려움


 


신영복 선생은 동양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인(仁)을 꼽고,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이며 “인간관계” 자체 또는 “관계들의 총화”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이 인권의 개념에 대해서도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권은 항상 ‘관계의 문제’이고, 중첩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특히 ‘권력관계’를 포착해 드러내는 노력이다. 인권은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는 약자들의 자리를 파악하는 언어다.


강 씨의 얼굴공개 논쟁은 가해자의 인권과 피해자 가족의 인권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얼굴공개를 찬성하는 주장은, 피해자 가족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게 인권은 사치라고도 했다. 그러나 연쇄살인범의 얼굴 공개 여부가 인권의 문제인 것은 ‘가해자-피해자’ 관계의 맥락이 아니다.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해간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여성들만을 골라 살해한 용의자 강 씨는 연쇄살인이라는 범죄의 맥락(가해자-피해자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자였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어 형사절차로 들어온 이상, 그는 형벌권을 행사하는 국가에 대하여, 그리고 선정적 소재를 사냥하는 언론에 대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관계의 약자다. ‘가해자 인권’이 아니라, ‘피의자 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언론에 의한 얼굴 공개는 기본적으로 ‘언론권력과 개인’의 관계 문제이고, ‘국가 대 피의자’라는 맥락과 상황의 문제인 것이다. 분노의 표적이 된 무력한 ‘개인’에게 언론권력이 남용된 것은 아닌지를 질문하고, 확인하는 것이 이러한 상황에 부합하는 인권의 문제의식이다. 피의자 강 씨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이, 살인범 강 씨에 대한 분노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인권을 말하면서도 충분히 그에 대해 분노할 수 있고, 분노해야 한다.


 



 


그래서 피의자 인권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피해자(가족)의 인권을 대립시키는 것은 ‘관계’로서 인권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피해자 가족들의 깊은 상처와 시민들의 분노를 헤아리는 공감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노와 보복감정이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피해자 가족의 분노를 치유하기 위해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에 형벌권을 주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해자(가족)의 인권은 다른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흉악범 얼굴이 공개되어 논쟁이 되는 맥락과 상황이라면, 피해자(가족)의 인권 역시 언론에 의해 함부로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프라이버시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고, 2차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한 보도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국가에 대하여는, 초동단계에서의 수사 실패가 비극적 결과를 확대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점검하고, 군포지역 치안 부재의 구조적 원인을 캐물어야 한다. 또 재판 절차 참여권이나 양형에 관한 의견 진술 제도 등 공적인 제도를 통해서 피해자 가족의 분노와 상처가 고려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문제다. 피해자 인권도 국가나 언론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상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여신상은 안대로 두 눈을 모두 가리고 있지만, 두 눈을 모두 뜨고 있는 모습도 있다. 또 한 쪽 눈만을 가린 모습이 풍자되기도 한다. 인권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여신상의 모습을 평가한다면, 한 쪽 눈만을 가린 모습이 상징적이다. 우리는 중첩되는 관계 속에서 인권의 관점이 필요한 권력관계를 찾아내야 하고, 그 관계 하에서 상대적 약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적 약자의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이 흉악범이라는 평가나 선악의 문제, 범죄 경중의 판단은 인권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복잡한 관계의 그물에서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인권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인권은 ‘외눈의 여신’과 같이 불편할 수 있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를 성숙케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사회에서 증발된 피의자 가족


 


얼굴 공개 논쟁 과정에서 강 씨 가족의 인권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터뷰를 요청해온 한 언론은 여론의 분노가 피해자 가족의 인권을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강 씨 가족의 인권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할 것이라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또 한 토론회에서 <조선일보> 기자는 ‘범죄자 가족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감내해야 한다’,‘피의자 가족들이 권리를 주장하려면 피해자 가족에게 먼저 보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도 한다’는 사례로 보충되곤 했다.


피해자 가족의 인권과 피의자 가족의 인권을 대립시켜 비교하면, 그 고통의 무게를 따지게 된다. 그러나 인권은 고통의 크기를 재서 더 큰 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인권은 권리-의무의 관계가 아니어서, 의무와 책임을 이행한 이후에야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다. 다시 확인하자면, 근본적으로는 피해자 가족의 인권과 강 씨 가족의 인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강 씨 가족의 인권은 피해자 가족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언론이라는 관계 맥락에 놓인 문제다.


 


또한 우리 사회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사회적 상황에 놓여 있다. 가령 미국의 경우는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의 장본인인 조승희와 그 가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사회적 여유와 합리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그거 뉘 집 자식이냐’를 묻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좌제의 기억도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본의 경우와도 그 배경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일본은 집단적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다. 자식의 잘못에 대하여 부모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부모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본에서의 얼굴 공개가 가족의 인권과 관련해서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일본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에서 천황에게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적극적으로 물을 수 없었던 이유가 개인의 책임을 사회화하는 일본 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강 씨의 사진공개 후 그 아들의 미니홈피는 네티즌의 욕설이 빗발쳐 폐쇄된 상태라고 한다. 강씨가 “내 아들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인면수심의 사이코패스에게도 부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도 인간이었다는 것이 곤혹스럽고, 불편할 수는 있다. 그래도 사이코패스의 부성에는 이유가 있다. 피해자 가족의 부성과 대립시켜 그 크기를 따질 일도 아니다. 다시 인권은 상황과 관계의 문제다. 피해자 가족의 인권과 피의자 가족의 인권을 대립시키는 것은 우리들 분노의 알리바이에 불과할 것이다. 인권의 관점으로, 관계와 상황의 겹을 더욱 세심하게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권 짓밟는 언론자유 구가하는 ‘아Q언론’


 


<조선일보>가 ‘미네르바’의 실명을 보도한 이후 많은 언론들이 그 뒤를 이었다. 실명에 이어 학력, 성적, 집 평수와 여동생의 근황까지 보도했다. 강 씨의 얼굴을 처음으로 공개한 언론은 <중앙일보>였다. 뒤이어 <조선일보>는 강 씨가 키우던 개와 함께 찍은 사진을 1면에 실었다. 그 후 다수의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얼굴을 공개했다.


언론은 강 씨가 흉악범죄자이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얼굴을 공개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정당한 알 권리의 대상이 아니다. 범죄예방 효과는 분노와 보복감정을 포장하는 허구적 논변이기 쉽다. 공개해야 할 공적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얼굴이 공개된 결과의 결론이다.


또 미네르바의 실명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공인이기 때문에? 범죄 성립 여부가 법리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미네르바의 실명 공개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관련된 문제다. 그가 자발적으로 공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의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는 ‘익명의 공인’, ‘미네르바’여야 한다. 미네르바 실명 보도는 단순히 언론의 상업적 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익명의 그늘에 숨어’라는 논리로 공격하고, 제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 토론회에서 <조선일보>의 공개 입장을 발표한 기자는 “인권 보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를 수용하는 것은 과거 선배 언론인들이 쟁취해온 언론의 자유를 스스로 목 조르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공개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언론마다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권을 말하지 않는 언론의 자유라고? 언론은 권력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시민과 소비자를 위해서 국가권력 행사의 정당성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비판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자유를 행사하는 언론의 책임이다. 사생활 보호와 언론의 자유에 관한 판단의 1차적 기준은 그런 권력관계를 고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일부 언론은 국가와 자본권력에는 철저히 무력하면서, 개인에 대하여는 언론의 권력을 행사했다. 권력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는 철저히 외면했던 그 언론들이다.


루쉰은 ‘아Q’라는 인물을 통해 강자에게는 비굴하면서도 약자에게는 폭력을 행사하는 노예적 자기기만을 ‘정신승리법’으로 형상화했다. 분노의 표적이 된 무력한 개인의 모자를 벗기고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Q언론’의 정신승리법에 불과하다.


 


 


최대한 분노하고 최대한 보장하자


 


우리가 증오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어느 정도나 보장해야 하는가? 최대한 분노하고,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거듭 확인하지만, 사이코패스에 대한 분노와 그의 피의자로서의 인권은 대립하지 않는다. 인권은 관계의 겹을 벗겨내서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노력이다. 또 그 불편한 노력이 우리 사회의 소통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2009년 3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어제(7월 14일) 정부가 흉악범의 신상을 공개하는 내용의 법안을 만들어, 이와 관련된 글을 이번 뉴스레터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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