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통신]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면 좋겠다 –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내가 좋아하는 한 친구의 블로그 제목은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는 블로그”이다. 물론 그 블로그가 정의에 대한 이야기로만 차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의 블로그를 들를 때마다 정의가 조금은 실현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세월호 참사 이후 두 달째가 흘러가고 있다.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이제 그 다짐에 노력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우리가 흘린 눈물들이 길을 만든다면 나는 그 길이 정의에 이르는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일까. 나는 세월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외쳤던 것은 우리가 타협했던 부정의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사건에서 각자 세상에서 싸웠던, 그리고 싸웠어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기적인 삶에서 매일매일 생존하기 바쁜 이 시대에, 세월호 사건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지고 있는 책임을 호출했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세월호에서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에서도 그랬었다.
▲ 세월호 사건 직후 북촌 거리의 노란 리본.
이제 그 역사가 일상과 더불어 흘러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숙제를 시작해야 한다. 적절할 때 적절한 활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 같은 경우는 무언가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고통스러웠던 두 달이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불행한 예감에 우울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제 질문을 찾았으니 그 답을 써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한 줄밖에 쓰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또 한 줄 쓰고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정의에 대해 각자가 쓰는 답변이 모두 같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여러 가지 대답이 있고, 사람마다 생각도 다르다. 이 유명한 질문을 제목으로 가진 마이클 샌델의 책을 휴가 때 읽었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후감과, 도시 사람들의 이기적인 에너지 소비와 공권력에 의해 내팽개쳐진 밀양 할머니들의 대답은 다를 것이다. 분향소에 매달린 노란 리본마다 메모가 가득했지만, 읽어 보면 서로 그렇게 달랐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이 부패한 권력에 의해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명분은 우리 사회에서 당분간 정의에 이르는 길을 가장 빛내게 되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세월호 사건 이후 ‘안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렇게 안전 전문가들이 많았는데 어째서 참사가 일어났고, 과거의 참사에서 왜 배우지 못했었는지부터 물어야겠다. 알고도 집행하지 않는 것이 태반이었고, 때로는 안전과 거리가 먼 규제 완화 정책이 안전의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여러 대책 가운데 시민들이 올바른 답변을 가려내는 혜안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미래에도 참사를 막지 못할 것이다. 대통령이 써낸 답안은 어떠했던가.
해경을 해체하고, 안전행정부를 해체하는 것은 매우 화려한 답안이었다. 사람들에게 속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하고 심리적 안정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주얼이 정답은 아니다. 정부조직개편을 넘어 ‘어떠한’ 안전 사회를 꾸릴 것인지 답변이 없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안전은 정권의 안전이다. 시장의 안전이다. 재산의 안전이다. 영토의 안전이다. 반면 어떤 이들에게 안전은 오로지 생명의 안전,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다. 후자의 기대에 전자가 배신으로 답할 것은 자명한 결과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의미로 안전을 부른다. 그런데도 언론과 시민들이 답변의 외관에 만족한다면, 안전을 비용으로 셈하는 장삿속과, 그 장삿속에 결탁한 부패 관료들이 사라질 리가 만무하다. 아니, 대통령이 관피아를 해체하겠다며 공공성마저 해체할 태세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대통령과 검찰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어 버렸다. 그러나 제대로 된 토론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안전의 이름으로 각자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든 것을 꺼내어 토론할 수 없다면 세월호 문제는 한 치의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시민들 스스로의 충분한 토론과 참여 없이는 이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안전 체제를 수립하기 어렵다. 진상을 올바르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관련 정보가 빠짐없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이 과정 없이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업계와 관료의 유착된 이해관계를 혁파하고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내부와 외부 모두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내부에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노동자와 내부고발자의 양심적 목소리가 가로막히지 않아야 하고, 외부에는 언론과 시민의 매서운 감시와 비판이 소통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있어야 한다.
▲ 5월 18일,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 현장. 출처_ ‘가만히 있으라’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keepyourplace?ref=ts&fref=ts
그러니 종착지에도, 가는 길에도, 인권과 민주주의가 반드시 충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안전 대책에는 인권이 믿음직한 파트너로 사람들 곁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사건은 시작부터 꼬여 버린 듯하다. 정보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실종자 가족들과 언론의 취재에는 감시의 눈이 따라다녔다. 청와대로 향하는 실종자 가족의 걸음은 가로막혔고 불온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대통령을 곤란하게 하는 보도는 최소화되었고 현장의 절규는 소음인양 편집되었다. 해경과 대통령을 비난한 목소리들은 신속하게 검거되었으며 사이버 공간에서 비슷한 발언을 하면 1천 명의 사이버 경찰이 당신도 검거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 지난 6월 10일, 홍대 앞의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 현장. 출처_ https://www.facebook.com/keepyourplace?ref=ts&fref=ts
지난 5월 17일과 18일 서울 시내에서 열린 주말 첫 추모 집회의 연행자는 216명에 달한다. 6월 10일 집회에서는 총 69명의 연행자가 발생했다. 참석자들은 “대통령이 책임져라”,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다가 끌려갔다. 청와대로 가는 모든 길목은 경찰이 철통같이 지키고 섰었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 나라에서 성역이었다. 왜 시민들은 청와대 앞에서 말하고 모이고 행동할 수 없는가? 우리에게 성역을 허물 자유가 없는데 진상이 제대로 규명될 것이며 적폐가 제대로 해소될 수 있을까.
이 사회는 서로 다른 이름의 안전처럼 서로 다른 이름으로 자유를 부르고 있다. 20세기 중반 신자유주의 선조들이 스스로를 지칭한 이름은 ‘질서자유주의’였다. ‘질서’와 ‘자유’가 기묘하게 동거하는 이 발상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자유 아닌 자유주의의 정체이다. 시장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들은 질서를 바란다. 시민들이 세상의 모순을 깨달아 동요하고, 마침내 싸우려 일어서는 것은 시장의 안정을 해치는 무질서이기 때문이 바람직하지 않다. 때로는 시민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시장의 자유에 위협적이기 때문에 그 싹수를 초장부터 잘라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시장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는 곧잘 서로에게 대립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자유와 안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시민들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판단과 결정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성역을 허락해서도 안 된다.
충분한 자유 없이는 안전 대책 역시 일방적인 관점에서 수립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9.11테러 이후 설립된 국토안보부와 관련 법률들이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을 거슬러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해 왔다. 국가정보기관의 힘이 기형적으로 커져서, 이들이 모든 시민, 나아가 전 세계 시민들의 전화와 인터넷을 감시해도 말릴 수 없게 되었다. 국가를 개조하겠다는 장담에 국가안전처의 미래를 일임한다면, 그 기대도 이렇게 우리를 배신할지 모른다.
▲ 지그문트 바우만. 출처_http://www.mariuszkubik.pl
“계속 희망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과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말이다(유동하는 공포). 내가 좋아하는 노작가는 이어서 말한다.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에서 그것을 제거하기까지는 길고 힘든 길이 있으며,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해서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지 아무런 보장이 없다. 심지어 그 길이 과연 목적지로 통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시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 그것은 우리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여정에 나서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제대로 시작하고 끝내기 위해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인권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글_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