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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장애인권# 장애인차별# 차별금지법

“놀이동산 좋아하세요?” – 에버랜드 시각장애인 이용거부 차별구제청구소송 항소심 승소

“놀이동산 좋아하세요?”

듣기만 해도 재밌는 놀이기구와 화려한 퍼레이드, 귀여운 푸바오를 떠오르게 하는 설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놀이동산의 즐거움과 함께 다양한 차별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아픈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은 장애인차별사건 사례회의가 있던 날,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의 김재왕 변호사가 저에게 한 질문이었습니다. 김재왕 변호사는 시각장애인 놀이기구 탑승거부에 대한 장애인차별구제청구소송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곧 있을 감정에 참여할 변호사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놀이기구 타는 거 좋아하면 감정에 참여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놀이동산과 놀이기구를 매우 좋아했기에 “가면 놀이기구 태워주시나요?”라고 했고, 김재왕 변호사는 놀이기구 타는 게 감정 중 하나라며 당연히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놀이기구를 타면서 하는 일이라니! 저는 무조건 감정에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정작 감정에서 놀이기구를 타지는 못했습니다. 1심 감정과 달리 감정인들만 놀이기구를 타며 감정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다월드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게 되어 푸바오를 창 너머로 바로 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기기는 했습니다. 비록 놀이기구는 못 탔지만, 이 사건 감정에 참여하면서 긴 시간 동안 시각장애인이 놀이동산에서 겪어 온 불합리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2015년에 시작되었으나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던 2022년 10월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고, 시각장애인들은 모든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 탑승을 거부당하거나 동반자가 있어야만 탑승이 가능하다고 하는 차별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2015년 5월 어느 봄날에 시작되었습니다. 소송의 원고인 시각장애인 3명은 에버랜드에서 자유이용권을 끊은 뒤 T-익스프레스 등 놀이기구에 탑승하려고 했으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당했습니다. 직원은 “만약 놀이기구에서 긴급정지를 하면 어떻게 탈출하실 거냐”고 물었고, 당사자들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이에 당사자들은 에버랜드의 시각장애인 놀이기구 탑승거부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한 장애인차별행위이자 이용 계약상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무불이행이라고 주장하며, 에버랜드 운영사인 삼성물산을 상대로 장애인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에버랜드의 입장은 범퍼카나 T-익스프레스는 탑승이 아예 불가능하고, 더블락스핀, 롤링엑스트레인, 렛츠트위스트, 챔피언쉽로데오, 허리케인의 경우에는 중증 시각장애인은 탑승이 불가하고, 경증 시각장애인은 동반자가 있어야만 탑승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에버랜드의 탑승제한 행위가 알려지자 롯데월드, 경주월드를 비롯한 다른 놀이동산도 안전상의 이유를 들며 시각장애인의 탑승을 거부하거나 동반자 탑승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다른 놀이동산의 차별행위에 대한 인권위 진정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이 소송은 에버랜드를 상대로 한 개별소송이었으나 그 영향은 모든 놀이동산에 미칠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사진설명] 시각장애인에 탑승이 제한된 놀이기구 ‘T-익스프레스, 더블락스핀, 허리케인, 레츠트위스트, 롤링 익스트레인'(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원·피고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자 1심 재판부는 에버랜드를 직접 방문하여 승·하차, 탑승, 비상대피 상황에 대한 현장검증을 실시하였습니다. 현장검증 후 재판부는 에버랜드의 위험성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단하면서 탑승거부행위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이므로 에버랜드는 원고들에게 손해를 배상하고, 시각장애인의 탑승을 제한하고 있는 어트랙션 안전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삭제하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버랜드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탑승 제한이 시각장애인의 안전을 위한 것이며, 더불어 다른 탑승자와 직원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항소하였고, 이탈리아의 놀이기구 관련 전문가에 의한 재감정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탈리아 감정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시각장애인 당사자를 피실험자로 하여 시각장애인의 놀이기구 탑승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후 에버랜드에서 감정을 하겠다고 하였고, 에버랜드는 이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연구가 끝난 후 에버랜드 감정이 시작되었고, 저는 감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 긴 싸움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놀이기구 탑승이 위험하기 때문에 탑승할 수 없다는 에버랜드의 주장은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으나,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원고이므로 대리인단은 에버랜드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거의 모든 주장을 다하였습니다. 감정결과보고서를 반박하면서는 시각장애인의 운동양태에 대한 연구자료를 제시하며 피고의 위험성 주장이 편견에 기초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위험성 감소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며 편의제공을 통해 위험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고, 각국 놀이동산의 가이드라인을 리서치하여 시각장애인에 대한 탑승제한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제한이 아님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공감 장애팀 자원활동가들이 3주 가까이 독일, 스페인, 일본, 중국, 호주 등 해외 놀이동산 가이드라인을 모두 리서치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소송 막바지에는 청구취지를 변경하면서 시각장애인 원고들의 전면탑승을 허용하고, 가이드라인 내용 중 시각장애인 탑승제한을 의미하는 문구를 삭제하는 것과 더불어 “시각장애인 당사자는 놀이기구 탑승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직원은 설명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을 가이드라인에 추가하라.”는 요구를 덧붙였습니다. 이 소송의 함의를 고려했을 때, 전면 탑승 허용과 설명의무 명시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지만, 과연 법원이 이 요구들을 모두 수용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고 선고 전날까지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원고 전부승소 결정을 하며 에버랜드가 위 요구를 모두 수용하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법원은 장애인이 위험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장애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며 에버랜드의 행위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조 제1항 제1호, 제15조에 해당하는 장애인차별행위임을 확인했습니다.

8년간의 소송 끝에 드디어 시각장애인이 마음 놓고 놀이기구를 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다시 돌아봤을 때 이 소송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에게 놀이동산은 여전히 차별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청각장애인,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은 여전히 위험하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당하고 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이나 점자판은 없으며,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접근성은 전혀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형 놀이동산 놀이기구 중에 휠체어를 탄 채로 탑승할 수 있는 놀이기구는 거의 없으며, 그 넓은 공간에 장애인 화장실은 제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버랜드의 사파리 투어버스만 보더라도 저상버스가 아니어서 휠체어 탑승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제일 처음 방문하게 되는 굿즈샵은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고,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정보제공 장치도 전혀 없습니다. 현재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제24조의2(관광활동의 차별금지)에서 종합유원시설에서의 차별금지나 편의제공을 규정하고 있으나, 단계적 적용으로 인해 해당 규정은 2025년 3월에야 적용됩니다. 따라서, 현재 장애인이 놀이동산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편의 제공은 매우 부실함에도 이를 개선하도록 강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시설개선을 위해서는 사업자뿐만이 아니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나 이에 대한 개선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이 소송을 시작하고 나서 때때로 놀이동산을 방문하여 놀이기구를 타며 스릴을 만끽하기도 하고 시즌마다 꾸며 놓은 장식을 보고 퍼레이드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놀이기구 한번 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려고 왔다가 차별의 경험만 하고 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놀이동산을 갈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불편하고 무거웠습니다. 오늘 승소 소식을 전하지만, 이 소송이 8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이 장애인이 마주한 차별의 벽이 여전히 높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저의 불편한 마음은 아직 여전하고 언제쯤 이 마음이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불편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잘 벼려서 또 다른 소송으로, 또 다른 승소 소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놀이동산을 좋아하신다면, 즐거움만큼 이 불편한 마음을 함께 간직해주시면 어떨지 청하며,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놀이기구를 타며 즐기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래봅니다.

아, 아직 피고가 상고를 하지 않아 소송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피고가 장애인차별행위를 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장애인과 함께 개선책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조인영

# 장애인 인권#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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