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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법 교육·중개

[월례포럼] 장애의 사회적 모델과 야성의 장애학







 

Ⅰ. 이들이 선로로 내려갈 수 있었던 까닭은?


2003년 5월 28일, 5호선 광화문역. 열차가 출발하자 한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선로로 내려갑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감은 쇠사슬을 선로에 묶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울시는 발산역에서 리프트사고로 숨진 장애인 윤 모씨에게 사과하라”고 외칩니다.  


이와 같은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투쟁은 2001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추락하는 사건을 계기로 시작하여 200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 시위는 그러한 흐름 위에 나타났던 하나의 사건인 것이죠. 이 흐름은 생각보다 강력했습니다. 그 이후로 꾸준히 여러 곳에서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러한 그들은 외침은 사회에 조금씩 작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적어도 그 이전보다는 불편함이 줄어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직까지도 이들이 겪는 불편함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강력한 장애인권투쟁의 흐름이 형성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더 이상은 못 참겠다’하는 쌓였던 불만의 표출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흐름의 밑바탕에는 이들의 ‘장애’개념 자체에 대한 어떤 인식론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인식이 이들 내부에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바로 장애의 ‘사회적 모델’인데요, 이는 바로 10월 월례포럼의 강연자이신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의 저자 김원영씨가 들려주실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그럼 원영씨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함께 들어볼까요.


 


 


Ⅱ. 장애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 의료적 모델 & 사회적 모델 


 



먼저, 의료적 모델은 장애에 대한 근대사회의 가장 전통적인 접근법으로, 이 모델에서 장애는 생물학적 손상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생물학적 손상을 치료해 장애를 ‘제거’하
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모델에 따라 장애인의 신체를 재활과정을 통해 사회 속에 적응시키는 각종 사회복지, 의료프로그램들이 고안됩니다. 이러한 접근방법에 따르면 장애는 부정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며, 생물학적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장애는 ‘제거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애 개념은 기존 임상의학에 기초한 의료적 모델로부터 ‘사회적 모델’로의 인식의 변화를 맞게 되는데요, 이 사회적 모델의 핵심은 바로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의 구분입니다. 즉, 손상은 부분적인 생물학적 결함인 반면 장애는 사회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애(disability)를 구성하는 원인은 사회로부터 기인한다는 것. 즉, 손상(impairment)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환경을 만든 것은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 따라서 사회는 법과 제도를 조정하고 이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의무가 있다는 것이 ‘사회적 모델’의 시각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접근방법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본격적으로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Ⅲ. 말할 수 없는 ‘내 안의 부르짖음’



원영씨는 뒤이어 조금은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 주제가 이번 포럼의 핵심 내용이기도 한데요. 그것은 바로 앞서 설명한 ‘사회적 모델’이 가지는 한계점에 관한 것입니다. 




원영씨의 말에 따르면 사회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장애인권운동의 이면에는 어떤 개인적인 고충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사회적 모델의 접근방법에 따르면 장애인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성격이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에 있어서 장애인권투쟁은 이동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장애인 개개인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나아가 내 몸이 좋아하는 이성에게 ‘섹시하게’ 보이길 바라는 “야성적 실체”입니다. 원영씨가 가지고 있던 고민의 지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비록 이러한 사회적 모델의 성공이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편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완성하였다 하더라도, 장애인들 내부의 해결되지 않은 고통, 손상된 몸을 ‘무조건 긍정’해야 하는 데 따르는 고통을 없애긴 힘들다는 것이지요. 사회를 향한 이러이러한 권리보장을 요구한다는 외침 속에서 그 추상적인 권리보장의 구호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불완전함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는 사회적 모델에는 이러한 틈새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셨습니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타이틀에 가려진 야성적 실체를 드러낼 수 없었던, 그래서 ‘사회변화’를 위해 땀 흘렸던 장애인권운동의 과정 속에서 느꼈던 ‘실존적’ 허전함. 원영씨는 그것이 사회적 모델의 딜레마이며 한계점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김: 난 그래도 사실 걷고 싶어.


조금 우습게 들리겠지만, ‘직립보행의 섹시함’같은 거, 있단 말이야.


친구: 그러한 욕망도 사회제도가 미흡해서 생겨나는 거야.


우리 같이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


김: …



(원영씨가 실제로 장애인권운동을 하며 겪은 일화입니다)



 


Ⅳ. 나는 ‘야한’ 장애인이고 싶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정치적 주체와 야성적 실체로서의 욕망이 동시에 충족되는 방향으로 장애 개념이 성립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장애인권운동의 접근방식으로서는 ‘야성적 실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존재합니다. 사회적 모델은 그 성격상 장애인 개인보다는 하나의 장애인 계급, 집단적 범주의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모델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해결책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연극을 좋아하신다는 원영씨는 지금까지의 그 고민에 대한 작은 결론으로서 ‘연극’을 제시하셨습니다.


원영씨의 이와 같은 고민은 비단 그 만의 고민이 아닐 것입니다. 2000년대부터 사회적 모델의 시각을 기반으로 정치적 권리획득에 힘썼던 많은 장애인들, 그들 모두가 안고 있는 고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덮어두려 해도 덮어둘 수 없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고민의 씨앗이므로, 이 교착상태를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논의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고민의 끝에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인권운동의 흐름이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요.




 


12기 인턴 이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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