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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익법 교육·중개

[월례포럼]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 학생인권조례 이야기




 



 

 

#. 나는 너희들을 때리지 않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조금 이상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는데―강연 중에 언급된 것처럼,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 가장 두려운 존재다― 우리를 만나서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나는 너희들을 때리지 않겠다.”였다. 반강제였던 야간자율학습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사람만 하라고 했다. 애들이 가장 거친 남자 고등학교, 그것도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이 모인 반에서 체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우리 반은 절반 가까운 학생이 예체능 계열을 희망했고 그 아이들이 야간자율학습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야자를 빠질’ 자유를 준다는 것도 그 당시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정말로 1년 동안 체벌 한 번 하지 않고 반을 잘 통솔했다. ‘아이들이 말을 정말 안 듣는다.’ 싶으면 앉혀놓고 말로 꾸짖은 것이 전부였다. 반강제로 야간자율학습을 시켰던 다른 반은 날이 갈수록 남아있는 학생이 줄었지만, 우리 반은 오히려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는 학생이 늘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만 남으니 조용했고, 면학 분위기도 제대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20명 가까이로 늘더니, 급기야 다른 반보다 더 많은 학생이 남아 있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때 가서야 내 생각도 바뀌었다. ‘때리지 않아도,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한 경험이 아니다. 교사가 체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오히려 학생들이 의구심을 가졌다. 학생들 스스로 ‘우리는 맞아야 말을 듣는 애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끼치는 피동성이고 노예근성이다. 야간자율학습 또한, 학생 스스로 학교에 남아 보충학습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사교육을 할 형편 또는 의지가 없는 학생들은 방과 후에 따로 갈 곳이 없고, 이들을 일일이 생활지도 하기 어려우니 교사가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방편으로 학교에 잡아둔다. 지자체에는 청소년을 위한 여가 공간이나 취미생활 및 특성화 교육을 할 만한 장소가 없고, 학교에도 이들을 따로 가르칠 여력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교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사실 교육의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공교육의 붕괴는 단순히 사교육비의 비중이 늘거나 선생님이 경찰한테 신고당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교육의 위기는 곧 시민을 양성하는 체제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미래까지 달려있는 문제다. 우리 중 학생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을까? 학교의 문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학교는 무엇일까, 대안은 무엇일까. 그 조그만 시작을 우리는 ‘학생인권조례운동’에서 찾았다. 학생인권조례제정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시는,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님을 만나보았다.


 




 

이번 포럼은 강의는 비교적 짧게, 질문은 길게 이루어졌다. 강의한 내용은 ‘서울시내 교육청 산하 11개 교육지원청을 순회하며 4천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던 내용’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강의 서두부터 인상적이었다. 70~80년대의 학교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서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을 비판했다.


“(80년대 이후에 사회는) 민주화가 되었고, 사람이 민주화 경향에 의해서 바뀌어야 하는데, 사람을 만드는 과정(학교) 자체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제 학교도 사회에 발맞춰 민주화 되어야 하고, 그 시작이 곧 학생인권조례 제정이다.

 

#.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학생인권의 유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는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는 1968년 유럽 청소년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이미 1968년부터 체벌을 금지하고, 학생들도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니까 때로는 서툴고 실수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때 이들을 바르게 지도하고 옆에서 도와줄 교사이지, ‘너희들은 미숙하니 내 말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권위적인 교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동시에 교사들의 책임도 명확히 하자는 것이 인권조례제정운동의 목표다. 학생들의 ‘실수할 권리’가 ‘학생인권’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실수할 기회가 없어집니다.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새로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을 얻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어요. 애들은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결국은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 아동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양상이 벌어집니다.”

 

교수님의 강연은 단순히 학생인권을 이해시키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의 근본적인 역할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국민교육체제를 이야기할 때 교육의 목표는 두 가지 아닙니까. 애들이 자기 벌어먹고 살 직업교육을 하는 것, 사회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민주교육을 하는 것.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부분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게 드러납니다.”


입시경쟁이 결국은 취직경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상기하면, 오늘날 학교 교육은 직업교육에만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발견하고 이에 맞는 진로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우리의 학교는 이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다 같이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20~30명씩 한 교실에 모여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닌가.

 

#. 체벌과 교권

 

학생인권을 이야기할 때 ‘체벌’을 떠올리기 쉽다. 물론 중요한 문제이지만, 교수님은 “체벌 문제는 이제,‘하지말자’는 쪽으로 결론이 어느 정도 나있다.”고 말했다. 체벌 이야기를 할 때 항상 같이 나오는 말이 ‘교권’의 문제인데, 교사들의 교권이 침해되는 상황에서 체벌을 금지하고 학생인권을 주장하는 것이 이를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그러나 교수님은 체벌과 교권의 왜곡된―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재정립한다. 일단 교권의 붕괴를 학생인권 또는 체벌과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권붕괴의 원인은 대입위주의 학교문화와 관료제적 체제 때문이다. 대입 중심의 과도한 경쟁으로, 일선 교사들은 학생 하나하나를 인간적으로 돌보기보다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교에 진학시켜 근무평정 점수를 잘 받을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학교 시스템은 교사를 교장 선생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로 전락시켜, 교사 자신은 학생 교육에 대해 재량권을 행사할 수 없다. 때문에 학교가, 그리고 교사가 (관료제적 성격에 따라) 권위적일 수밖에 없고, (대입위주 경쟁에 따라) 경쟁체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위적인 교사는 학생들을 타이르기보다 때려서 말을 듣게 하고, 경쟁적인 교사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내치고 (공부를 잘할)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만을 집중관리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교권 추락의 문제는 체벌 또는 학생인권과는 무관하며, 학교문화와 수직적 체제에 원인이 있다. 이때 체벌을 금지하고 민주적인 학교문화를 조성하고 학생인권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학교문화를 바꿀 계기가 된다. 강연 이후 많은 질문들이 교권침해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교수님은 아래와 같은 말로 다시 한 번 정리했다.


“학교 내의 권력관계 속에서 교사의 권위가 침해된다. 일진들이 건드리는 건 남선생님들이 아니라 힘없는 기간제 여선생님입니다. 교사의 노동권도 침해됩니다. 실제 교육과정편성, 수업자료 확보, 수업진도 등에서 모두 교사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습니다. 교사가 전문직으로서 어떤 권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사들이 권한을 가질 때 학생들로부터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교사의 권위는 인품과 지식에서 나오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인품이 소통되는 구조가 아니에요. 학원선생님과 다를 게 없죠.”

 






#. 학생들이 스스로 규율하기

 

학생인권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면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이후의 방향도 명확하다. 아이들(학생)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어른들(교사와 학부모)은 이를 반겨야 한다. 그들이 의무 또한 기꺼이 지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학생들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이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다소 힘들어 보인다면, 최소한 이미 정해진 규칙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하지 않는다.


“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학교 규정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없어요. 그냥 머리 얼마만큼 잘라라, 이게 다죠. 너희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 제재를 당한다, 이런 말이 없어요.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 모아놓고 학교 규정을 이야기기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교칙 위반 자체도 달라지더래요.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죠.”


스스로 세운 규칙은 학생들도 어기고 싶지 않아하고,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한 어겼다고 해도 이를 지도하고 바로잡을 여력이 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회를 좀 더 활성화 시킬 필요가 있다.

 

#. 학교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다

 

학생인권의 논의는 결국 학교라는 큰 틀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학교라는 큰 틀은 우리 사회 전체를 포섭하며, 구성원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 또한 포함한다. 즉 단순히 학생 스스로가 인권을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며, 학부모와 교사, 이에 더해 정부(중앙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까지 협력해야 바뀔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단순히 학교를 졸업했다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들이 외면할 문제가 아니다.


교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명쾌했고 핵심을 찔렀다. 학생인권에 대한 많은 우려와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또한 그는, 학생인권조례를 공교육의 붕괴를 막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우리가 다녔던, 혹은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노력이고, 우리들이 원하는 학교를 만들어가려는 시작이다.


“인권조례가 모든 것의 해결책도 아니고, 모든 것의 원인도 아니라는 겁니다. 일부분일 뿐이죠. 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조그마한 단초를 찾자는 겁니다. 노력의 출발이지, 해결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거죠.”

 


글_김우중(13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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