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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여성인권

[공감 포커스]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피감독자 간음 및 추행 사건 제1심 판결 톺아보기

2018년 8월 14일,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 씨가 충남도청의 수행비서와 정무비서직을 거친 여성에게 총 10건의 성폭력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제1심 법원이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법원의 결론은 공소사실 전부 무죄입니다. 이번 호 <공감 포커스>에서는 제1심 판결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판결문 전문(114쪽)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1심 법원이 선고기일에 낭독한 선고문(13쪽), 선고 당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배포한 보도자료(9쪽)을 기본 자료로, 재판과정과 선고 이후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충자료로 삼아 판결 내용을 살펴봅니다. 판결문 전문을 분석하지 아니한 한계가 있으나, 1심 법원 스스로 선고문에서 ‘재판부에서 판단한 핵심 내용’을 담았다고 밝혔으므로, 판결의 ‘핵심 내용’에 대한 검토로서 의미가 있으리라 봅니다.


 대상 판결 : 서울서부지방법원 2018. 8. 14. 선고 2018고합75 판결[관여 법관: 조병구(재판장), 정윤택, 황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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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적과 흑’을 쓴 작가 스탕달은 문장 연습을 위해 프랑스 민법전을 매일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민법 제정에 참여하면서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면 법률가가 아니라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프랑스어를 쓴 법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라며, 법전이 문장 교재가 된 것은 나폴레옹의 공이라는 얘기도 있다.

 

우리나라 형법이 프랑스 민법처럼 작가가 읽고 공부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민이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한 것은 아니다. 형법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이 구현되도록 씌어 있기도 하다.

 

안희정 사건에 적용된 법조 중 하나인 피감독자 간음죄(또는 업무상 위력간음죄)를 정한 형법 제303조 제1항은 형벌 규정을 빼고 무엇이 범죄인지 쓴 부분은 두 줄도 채 되지 않는다.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

 

한국어로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간음’(개인적으로 이 낱말은 범죄를 규정하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은 형법에서 쓰이는 독특한 단어로 성적 침해의 유형 중 하나이다. (‘위계’는 속임수를 쓴다는 의미로 안희정 사건에 적용되지 않으므로 생략하면) 남는 것은 ‘위력으로써’다.

 

그런데 법률 해석의 1차적 원칙은 문언 해석이고, 낱말의 의미는 해석의 출발이자 한계이다. ‘위력으로써’의 ‘으로써’가 수단을 나타내는 격조사라는 것조차, 형법의 해석에 반영된다. 다른 성폭력범죄 구성요건이 ‘폭행 또는 협박으로’(강간죄),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준강간죄)와 같이 범죄 구성요건에 ‘수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체계적으로도 대구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1심 법원의 선고문 두 번째 장을 넘겼을 때 가장 의아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1심은 이 사건의 쟁점이라고 하며 범죄 구성요건을 쓰면서 이런 기본적인 문언 해석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법률에 씌어 있지 않은 구성요건을 추가했고, 그런 해석은 구체적인 공소사실 판단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1심은 “법적 판단에 있어서는 현행법상 구성요건에 대한 엄격한 해석, ……,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결론을 내려야 하고, 그것이 법원의 역할이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선고문 6쪽) 구성요건의 엄격한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 1심의 현행법상 구성요건 해석은 엄격하고 타당한가? 이하에서 살펴본다.

 

 

[톺아보기 1] 2중의 인과관계 요건 등 처벌법규에 없는 구성요건 요소 추가

 

1심의 쟁점 설정

 

1심은 ‘이 사건의 쟁점’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썼다. “우리 처벌규정상 위력 관계 즉, 권력적 상하관계에 놓여있는 남녀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할 수 없고, ①상대방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위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②그 위력이 행사되어야 하고, ③행사된 위력과 간음, 추행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하고, ④그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폭력범죄의 구성요건 구조

 

한국 형사법상 성폭력범죄 구성요건 구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대부분의 범죄 구성요건이 『상대방(피해자)-행위 수단(폭행, 협박, 위계, 위력, 항거불능 이용 등)-행위(성적 침해, 즉, 성기 삽입, 성기 외 성적 삽입, 추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건에 적용되는 「형법」 제303조 제1항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제10조 제1항도 규정이 길어 보이지만 『‘업무 …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 감독을 받는 사람(피감독자)’ –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 간음/추행』으로 나눌 수 있고, 이는 『상대방(피해자)-행위 수단-성적 침해』의 3요건 구조에 해당한다.

 

그런데 법원은 이 사건의 쟁점을 설명하면서, 수단으로서의 ‘위력’을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라는 두 가지 요건으로 나누고(위의 ①, ②), 법률규정에 없는 위력과 성적 침해(간음) 사이의 ‘인과관계’라는 요건을 추가하고(위의 ③), 성적 침해(간음)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가하고 있다(위의 ④).

 

①, ②의 행위 수단으로서의 ‘위력’ 판단을 ‘존재’와 ‘행사’로 나누는 문제점은 후술한다. 인과관계를 추가로 구성요건요소로 보는 1심의 해석에는 법률규정의 문리 해석의 한계를 일탈하고, 체계적 해석에 반하는 잘못이 있다.

 

위력과 간음/추행행위 사이의 인과관계 요건(위의 ③) 불필요

 

우리 형사법상 성폭력범죄는 구성요건적 행위가 ‘원인이 되는 행위’와 ‘결과가 되는 행위’로 구성되는 범죄가 아니다. ‘폭행이나 협박’이 원인이 되어 ‘강간’의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 것처럼, ‘위력’이 원인이 되어 ‘간음/추행’의 결과를 낳는 범죄가 아니라는 뜻이다. 폭행이나 협박, 위력은 범행의 수단이 되는 행위이다. ‘폭행으로 강간’하고, ‘위력으로써 간음’하는 범죄인 것이다.

 

일반인의 언어 용법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범죄 구성요건에서 A와 B 사이의 인과관계를 요구할 경우,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 ‘A+B’라 는요건 2개가 아니라, ‘A+B+인과관계’라는 요건 3개가 필요하게 된다.

 

‘인과관계’는 범죄 구성요건으로 포함될 경우 범죄 성립 여부 판단시 쟁점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범죄와 인과관계가 필요없는 범죄는 구분된다. 그런데 1심은 법률 규정에 없는 ‘위력’과 ‘간음/추행’의 인과관계를 요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통상의 성폭력범죄 구성요건 해석과도 다르고, 법률 규정의 문리적 해석의 한계도 벗어난 것이다.

 

피감독자 간음죄를 상호 인과관계가 요구되는 분리된 두 개의 행위로 이해할 경우, 성폭력범죄의 ‘수단’과 ‘성적 침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를 성폭력범죄로 판단하기가 불가능하거나 어렵게 된다. 원인과 결과는 근소하더라도 시간 차이를 전제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폭행하면서 강간’하는 행위, ‘위력으로써 간음’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데도 이를 배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판결문 전문을 확인하면 명시적으로 이를 분리하여 판단하였는지 여부가 드러나겠으나, 설령 판결문에는 분리하여 설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1심이 법률에 없는 성폭력범죄의 인과관계라는 구성요건을 잘못 추가하면, 법관은 공소사실 판단시 성폭력범죄를 시간차가 필요한 단계적 행위의 연속으로 이해하여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간음/추행행위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 발생 요건(위의 ④) 불필요

 

성폭력범죄는 ‘성적 침해’ 자체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이지(그래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호법익이 된다) ‘성적 침해’ 행위 외에 추가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의 결과’가 범죄 구성요건 요소가 되지 않는다. 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성폭력범죄 구성요건 해석시에도 마찬가지다. 1심이 추가한 이 부분 구성요건은 전적으로 1심이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이에 관해서는 후술한다)

 

이 사건에 적용되는 피감독자간음/죄추행도 간음/추행행위라는 구성요건적 행위 ‘자체’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법률에 규정된 범죄이지, 간음/추행행위를 ‘원인’으로 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를 요구하는 범죄가 아니다.

 

 

[톺아보기 2] 주체 요건인 ‘업무상 감독자’ 지위와 행위 수단으로서의 ‘위력’ 혼동

 

1심의 선고 내용

 

1심은 이 사건 쟁점 설명시 “위력 관계 즉, 권력적 상하관계에 놓여있는 남녀 사이”라고 하고(선고문 2쪽), 공소사실을 판단하면서 “피고인에게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의 위력이라고 볼 만한 지위와 권세가 있었는지에 관하여 보면,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본다면 이는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의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선고문 7쪽)라고 선고하였다.

 

법원 보도자료와 선고문에는 “기본적인 위력관계는 존재하지만, 피고인이 이를 상시적, 일반적으로 행사해 왔다고는 볼 수 없음”, “피고인이 도청 내에서나 피해자에 대해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에 기초한 위력을 일반적으로 항시 행사해 왔다거나 이를 남용하는 등 이른바 ‘위력의 존재감’ 자체로 피해자나 기타 주변 직원 등의 자유의사를 억압해 왔다고 볼만한 증거는 부족합니다”라고 하며 “개별 공소사실의 상황에서 피고인이 어떠한 위력을 행사해 왔는지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라고도 써 있다.

 

 

검토

 

이 사건에 적용되는 법률조항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사건에 적용되는 범죄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력으로써” “간음/추행“한 행위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률조항의 문언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간명하기 때문에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인가’, ‘위력으로써'(‘로써’는 ‘어떤 일의 수단이나 도구를 나타내는 격조사’이다) ‘간음했는가’라는 범죄 구성요건요소가 충족되었는지 심리하면 된다.

 

업무상 감독을 하는 지위에 있으면 범죄의 주체 요건을 충족하고 ‘위력’은 범죄의 수단행위로 검토하면 충분하다.

 

이 사건에서는 피고인은 도지사이고 피해자는 수행비서 또는 정무비서의 직위에 있었으므로, 이것만으로 피고인이 업무상 감독자 지위에, 피해자가 업무상 감독을 받는 지위에 있어 주체와 상대방(피해자) 요건을 충족한다. 범죄의 행위 요건 검토는 그 다음 문제이다.

 

그런데 1심은 ‘위력 관계’, ‘권력 관계’, ‘위력’이라는 용어를 혼용하면서(그리고 ‘위력의 존재’, ‘위력의 행사’까지 섞어), 범죄의 주체와 범죄의 수단을 혼동하고 있다. 그 결과, 피해자가 아닌 다른 도청 직원에게까지 ‘위력’을 일반적으로 행사했는지, 남용했는지 심리하고 ‘위력의 존재감’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에 대한 성적 침해가 위력으로 행해졌는지와는 원칙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는 문제이다(부가적인 정황사실을 참작하기 위해 심리해서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무관하고 불필요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피고인은 충남도청 내 모든 직원에 대하여 업무 감독자로서의 지위에 있지만 위력간음의 혐의를 지는 상대방은 특정의 피해자이며, 따라서 특정의 피해자에 대해서 ‘위력으로써’ 간음했는지를 심리하면 충분하다.

 

위와 같은 주체 요소인 ‘업무상 감독자’ 지위와 행위 수단으로서의 ‘위력’ 구성요건 요소에 관한 1심의 혼동은 사실 인정과 공소사실 판단에 일정한 영향을 **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 전문을 보도한 언론에 의하면, 피고인이 코피를 흘리는 수행비서를 대신해 운전을 스스로 하거나 나이어린 흡연자들과 담배를 피거나 또는 직원들이 불만을 비실명으로 낼 수 있는 무기명 토론방을 운영하는 등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고 참모진과 소통하는 정치인’이라는 사실(경향신문 2018. 8. 19. 입력 기사)을 ‘위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되거나 남용’되지 않은 근거로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직원’에게 ‘위력의 일상적 행사나 남용’이 있었는지 여부는 ‘피해자’에게 ‘위력으로써 간음’한 공소사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권력관계 자체의 입증만으로 바로 성폭력 피해를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일반인의 의문과 논란은 1심이 이 사건에 적용되는 범죄 구성요건 해석을 잘못하고 별개의 범죄구성요건인 ‘업무감독자’ 지위와 성폭력 수단인 ‘위력’ 판단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 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업무감독자 지위에 있는 전국의 모든 도지사가 ‘위력으로써 간음/추행’하지 않는다. 이 사건 피고인도 충남도청의 공무원 모두에 대해서 업무감독자 지위에 있지만 ‘위력으로써 간음/추행’한 사람은 특정인이다.

 

1심 법원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해석과 결론을 강조했다. 헌법상 죄형법정주의는 법률 해석의 한계로서 법률 문언을 제시하고, 법률 문언의 뜻은 법관에 의한 해석의 최종 한계를 설정한다. 1심은 앞에서 본 것처럼 적용 법조에 없는(문언에 없고, 성폭력범죄의 구성요건 체계에 맞지 않는) 구성요건 요소를 추가하여 적용 법조를 해석했으므로, 1심의 적용 법조 해석은 법률 문언의 한계를 벗어났다.

 

헌법의 죄형법정주의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추해석을 금지하므로 1심의 해석이 죄형법정주의 위반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1심의 구성요건 해석은 법률 문언의 한계를 넘는 해석이므로 법원의 전제와는 달리 그 해석이 엄격하다고 볼 수도 없고 타당하다고도 볼 수 없다.

 

 

[톺아보기 3] 보호법익 몰이해와 그로 인한 공소사실 판단의 부당성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으로서의 성적 자기결정권

 

성적 자기결정권을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로 구분하고,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은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심도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하며,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적극적 의미에서 성적 행위를 할 것인지 여부와 그 상대방 및 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소극적 의미에서 성적 침해를 방어하고 배제할 권리를 포함하는데, 형사법 규정을 통해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은 주로 후자입니다.”(선고문 3쪽)

 

 

성적 자기결정권의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에 관한 1심의 혼동

 

그런데 1심은 곧바로 다음과 같은 선고를 이어 한다.

 

“(남성우월적․전근대적 사회구조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는 보호하여야 하고 여성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보호법익으로서의 ‘정조’라는 개념은 폐기되고, 성적 주체성을 가진 존재가 행사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이 보호법익으로 교체된 점 뿐만 아니라) 개인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자기 책임 아래 각자의 생활을 결정, 형성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이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여성은 독자적 인격체로서 자기 책임 아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당연하고, 이러한 여성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오히려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고 나아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선고문 3-4쪽)

 

위의 선고 부분은 개인의 성적 자유, 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의 ‘적극적 의미’를 풀이한 것이다. 우리나라 형사법 규정의 성폭력범죄는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고, 앞에서 1심은 형사법 규정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이 주로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고 판시하자마자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들고 나온 것이다.

 

선고문의 이 부분 판시는 매우 낯익은데 바로 헌법재판소가 2009년 혼인빙자간음죄의 위헌결정을 하면서 쓴 부분이다. 1심의 판시 중 “개인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사회관을 바탕으로 …… 민주시민이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 여성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오히려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고” 등등의 설명은 2009년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문자 그대로 옮기거나 그 취지를 반영하여 쓴 것이다.

 

혼인빙자간음죄, 간통죄가 모두 헌법 제10조에서 도출되는 자기운명결정권으로서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였다는 이유로 위헌 선언된 범죄이다. 이때 문제되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적극적 의미’이다. 혼인빙자간음죄의 경우, 남성이 성관계와 같은 성적 제안을 하면서 ‘결혼하자’는 속임수 방식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형사처벌하는 것은 남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여성은 남성의 기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성적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적극적 의미)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법률규정이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논리이다. 이와 같이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권리 행사에 대하여 국가가 제한하고 침해하는 국면에서(혼인빙자간음죄의 경우 범죄로 처벌) 논의된다.

 

1심의 이 부분 판시가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이 아니어서 범죄 성립 여부 판단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거나(몰이해),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판단도 성폭력범죄 성립 여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바로 앞에서 보호법익이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판시를 바꾸는 것인지는(전후 모순) 선고문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판결문 전문에서 확인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데 성적 자기결정권의 적극적 측면과 소극적 측면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개념상으로는 구분된다.

 

성폭력범죄는 피해자가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성적 자유의 행사 불가능) 이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가진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기 때문에(성적 침해에 대한 방어와 배제 불가능) 이를 처벌하는 것이다.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을 소극적 의미로 파악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성폭력범죄 규정도 성적 침해의 방어가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상황(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상황)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규정되며, ‘폭행 또는 협박’, ‘항거불능 상태의 이용’, ‘위력’과 같은 요건이 성적 침해에 대한 방어와 배제가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상황으로 대표된다.

 

바꾸어 살펴보면,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으로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논의되는 것은, 성적 침해의 방어와 배제 측면, 즉, 내가 원하지 않거나 내 의사에 반하거나 내가 동의하지 않은 성적 행위에 대하여 방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범죄로 규정하고 형사처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경우, 침해하는 행위를 미리 범죄구성요건으로 규정한 것이 성폭력범죄 규정이다. 따라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곧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이 된다.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이 침해되는 행위를 범죄로 구성하기 때문에 구성요건해당성을 검토하는 것과 별개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여부(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를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무용하다.

 

 

1심의 보호법익 몰이해로 인한 결과 : 피해자의 ‘적극적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가능성 심리는 잘못

 

1심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잘못 이해해서 공소사실 판단시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 가능성이나 침해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부당하다. 공소사실 판단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는 판결문 전문을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일반론으로는 공소사실 인정 여부 판단시 보호법익인 권리의 행사 가능성을 심리하는 경우는 없다. 앞에서도 쓴 것처럼 모든 범죄는 보호법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구성요건으로 규정한다. 그러니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가 성립하면 곧바로 보호법익이 침해된 것이기 때문에 법원은 구성요건적 행위인지 여부만 따지면 된다. 구성요건적 행위 판단 이후에 다시 그 범죄가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그것이 권리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면)을 적극적으로 누리지 못한 사정을 묻는 일은 없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수폭행죄(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폭행)의 보호법익은 신체의 자유이고, ‘위험한 물건을 휴대한 채 폭행하는 행위’ 자체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반복하여 쓰지만, 구성요건적 행위가 곧 보호법익을 침해를 뜻하므로 특수폭행죄의 피해자에 대하여 ‘신체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었는데 왜 행사하지 않았냐’고 묻지 않는다. 특수폭행죄의 구성요건적 행위가 실행되는 순간 바로 보호법익인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기 때문이다.

 

절도죄 성립 여부 판단시 피해자의 소유권 행사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도둑이 소매치기를 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도둑에게 왜 ‘소유권에 기초한 소유물 반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성폭력범죄에서도, 사람을 협박하여 추행하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추행으로 인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 피해자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있었는지 다시 묻지 않는다.

 

[다만 구성요건을 해석하면서 보호법익이 호출되는 경우는 있다. 성폭력범죄에서 ‘추행’ 요건은 행위 태양이 다양하기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의미’가 있는지 살필 여지가 있다. 모든 신체 접촉이 추행이 아니라 일정한 성적 의미가 있는 신체 접촉만이 추행이 되는 이유이다. 어깨를 두드리는 행위는 추행이 아니지만, 직장 회식 장소에서 블루스를 추면서 어깨를 감싸안는다면 추행 행위로 평가될 여지가 있는데 이때 소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행위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이 사건 1심 판단으로 돌아오자.

 

선고문의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결코 낮다고 볼 수 없는 피해자로서는 적어도 피고인의 이러한 행위가 미투 운동의 사회적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하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선고문 10쪽)과 같은 판시를 보면, 1심은 성적 행위의 상대방을 내가 결정한다는 식의 ‘적극적 의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 또는 행사가능성이 피해자에게 있었는지 여부를 심리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나아가 1심은 ‘운전비서와의 갈등 상황에서 드러나다시피 피해자는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도 아니하’다는 점을(선고문 11쪽) 공소사실 판단의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1심 판단은 피해자의 ‘적극적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능력과 행사가능성을 심리한다는 점에서도 부당하지만,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가능성을 피고인에 대한 관계에서가 아니라 제3자로 넓혀 판단했다는 점에서 더욱 부당하다.

 

– 2편에 계속 –

 

글_ 차혜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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