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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법 일반

故백남기 변호인단





 


 


사과하지 않는 정부, 사건이 되고 만 백남기 농민의 죽음
 
지난해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지던 백남기 농민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생명이 위독하다는 후속 보도에 애가 탔습니다. 하지만 맡고 있는 사건들도 많았고 공감에서 해오던 인권영역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실은 이 사안이 어떤 사건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무리한 공권력의 행사였고 그로 인해 국민이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었기에, 적어도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가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가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사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불법 시위에 대한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아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시위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고 “특히 복면을 쓴 시위는 못 하게 해야 한다”며 집회 참가자들을 IS 테러리스트에 빗대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표현수단인 집회·시위를 철저히 불온시하는 시각이었습니다. 백남기 농민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다짐이었습니다. 끝내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층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민변의 변호사님들과 함께 백남기 농민과 가족들을 대리하여 손해배상청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사과하지 않겠다면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하여서라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피고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일반적인 국가배상청구와 달리 당시 경찰청장 등 명령권자와 직접 살수를 한 경찰관에게까지 손해배상책임을 묻기로 하였습니다. 이 사안만큼은 직접적인 가해행위가 도를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경찰이라 하더라도, 아니 공권력의 현현(顯現)인 경찰이라면 더욱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나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손해배상책임이 향후에 선량한 경찰관으로 하여금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근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꼼꼼히 준비했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막 시작되던 상황에서 백남기 농민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좀 더 빠르게 소송을 진행하지 못했다며 자책하던 바로 그때부터 한층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물대포는 경찰이 쏜 것이었습니다. 살인미수, 업무상 과실치상,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을 이유로 한 고발사건의 수사대상인 경찰이 갑작스레 고인을 부검해서 사인을 규명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백남기 농민이 눈을 감던 바로 그때, 시신이 있던 서울대병원과 부검을 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는 총 45개 중대, 약 3,600명에 달하는 경찰력이 순식간에 배치되었습니다. 당장에라도 부검을 하러 달려들 것만 같은 섬뜩한 광경이었습니다.
 
가족들의 고발사건에 진전은커녕 최소한의 수사 의지조차 찾아보기 어렵던 상황에서 고인을 부검하겠다는 경찰의 입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법적으로도 부검의 필요성은 변사자, 즉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한하고 있음에 비추어보더라도, 물대포에 쓰러져 317일간 중환자실에서 매일같이 의무기록을 남긴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부검의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부검영장은 기각되었으나 검·경은 거듭 부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재차 신청된 부검영장에 대해 법원은 조건을 달아 허가해주고 말았습니다. 최근에야 언론보도를 통해 조금씩 알려진 부검영장의 내용을 보면, 검·경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부검을 신청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수사대상이 자신의 책임을 벗기 위해 고인의 시신을 찢어보겠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응당 가족의 동의가 필요할 것 같은 부검영장. 그러나 우리 형사소송법은 가족의 동의와 무관하게 부검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961년 5월의 군사쿠테타 이후 9월 1일 자로 신설된 조항에는 “긴급을 요할 때에는 영장없이 부검을 할 수 있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이 조항들은 오늘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끔찍한 일이지만, 과거 국가범죄에 희생당한 이를 가족과 동료들의 눈앞에서 가로채 강제로 부검하고 왜곡된 사인을 발표한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였고 적어도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부검영장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불복절차가 필요한 일은 이제는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백남기 농민의 사건에서 목도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과거와 달리 점잖은 듯 다가오는 경찰의 협의요구는, 실상 불필요한 부검절차를 세련되게 강제하겠다는 압박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은 스스로 발부한 부검영장의 의미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가족들과 협의를 하라”는 조건들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불안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317일을 매달려있었던 백남기 농민은, 눈을 감고서도 2주가 넘도록 여전히 그 자리에 매달려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행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는 없었습니다. 사법부가 책임 있게 갈등해소에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입법부의 청문회도 사건을 정리하거나 가족들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백남기 농민 사건은 국가의 존재의의를 되묻게 합니다.
 



 
 


국가의 존재의의를 증명하는 사람들
 
입법·행정·사법은 국가권력의 기본적인 작용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들 세 영역이 서로 견제하며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것이라 기대하였고 그렇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백남기 농민의 사건에서 이들 세 영역은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고 오히려 공격하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눈을 감던 그때, 집결한 경찰들을 뚫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함께 서기로 한 셈입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가족들과 함께 밤을 새워 고민하고 글을 쓰고 회의를 하는 떡진 머리의 시민들은 비어버린 국가작용을 메워보려는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의 시민들은 모든 국가권력의 작용이 멈춰버린 시·공간에서 국가의 존재의의를 증명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상(非常)한 국면입니다. 국면을 속히 정상으로 돌리는 방법은 한층 비상한 집결뿐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참 역설적인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글_김수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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