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험을 떠나며 _ 김지용 펠로우, 미국변호사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족법, 가정 폭력, 불법 행위, 형사법 및 산재 보상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저소득층을 상대로 운영하는 법률 보전에서 변호사로 일을 했다. 이런 구조에서 일을 하면 전문 분야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의뢰인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무엇이든, 나는 공부를 해서라도 맡아야만 했다. 덕분에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무서운 동네에 가서 범죄자를 찾아내고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This is a legal document. You are served.” 라고 말하며 소환장도 직접 전달한 적도 있었고, 상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수사도 진행해 보았다. 가해자를 잡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하여 형사도 만나보고, 법정에서 나보다 경험이 많은 변호사를 상대로 기적적으로 이겨보기도 하고, 또 권위 있는 판사들이 법정 운영하는 것도 직접 겪어보았다. 비명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는 의뢰인부터 여유가 없는데도 조그만 선물까지 챙겨주는 의뢰인도 접해보았다. 함께 일하는 백인 변호사들이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적인 언어와 행위 가하는 놀라운 경험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참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나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찾아보았다. 검색을 시도할 때 마다 등장한 유일한 단체는 공감이었다. 이메일로 연락을 하고 2016년 매우 더운 여름날 아침에 황필규 변호사를 만났다. 인터넷으로 알아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공감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이 단체가 한국에서 제일 널리 알려진 공익변호사 단체이며 공익 인권 분야의 유명한 변호사들이 모여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회의실 안에 있는 화장실 하나를 20명 넘게 공유해야 했던 변변치 않은 샌프란시스코의 사무실에 비하면 공감은 궁전 같았다. 황변호사는 본인의 업무와 조직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인터뷰 끝에 10년 뒤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나에게 물었을 때 난 간단히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있는 지금의 황변호사님 자리에 내가 있고 싶다”고 대답을 했다. 이게 얼마나 시기상조한 답변이었는지 지금에 와서 느낀다.
그 후 나는 공감에서 펠로우로 일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기본적인 번역과 다른 나라의 NGO운영, 난민/무국적자 결정 절차 등의 기초적인 리서치 작업들로 시간을 보냈다. 맙소사. 설마 이런 일들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 리서치 하는 작업이 직접적으로 법적인 도움을 주는 것 보다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 과제를 받기 전인 2017년 새해 첫 출근일에 공감의 5개년 전략 계획을 다시 수립하고 새로운 미션과 지향을 만들어 보았다. 나는 공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꼭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그 당시에는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어리석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황변호사에게 나는 ‘모금에 대해 더 알아보겠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바로 그에 맞는 교육에 들어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의 소명이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느 봄날, 황변호사는 어떤 회의에 참석하기를 권했다. 대략의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어떤 성격의 회의인지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 회의에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이 참석했다. 한국인의 얼굴 특징을 가졌고, 두껍고 매우 검은 긴 생머리를 가졌으며 영어만을 사용하는 그녀가 황변호사와 함께 수 년 동안 해외 입양인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같이 일해 온 동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바로 말이 통했고, 그 이후의 일들은 지난번에 올린 ‘The Brave : 용기’라는 글에 이미 적혀있다.
몇몇 의뢰인을 소개 받으며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의뢰인과 직접 만나면 그들은 떠올리기도 싫은 고통스러웠던 추억을 용기 내어 나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는 오랜 기간을 두고, 하지만 확실하게 겪어야만 하는 과정들을 함께 밟으며 그들이 빼앗긴 정당성을 되찾을 수 있게 전략을 세우고 돌진했다. 이 모든 과정이 겉으로 보이기에는 쉽게 보일수도 있지만, 강한 결심을 바탕으로 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하다. 제일 힘든 과정은 의뢰인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었다. 언급했듯이 이들은 수년간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했던 제도에 배신을 당했고, 아무에게나 신뢰를 주지 않는다. 신뢰는 얻는 것이지 강요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기나긴 기다림의 끝에는 강한 불빛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팀으로 함께해 얻을 수 있었던 성과였다.
그 후, 다른 기회들은 자동적으로 생겨났다. 어느 날 나 자신을 보니 국회회의에 참석하고, 국회의원들과 악수하며,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대형 로펌과의 MOU 기회도 마련하고, 한 주제를 가지고서 변호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큰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하면 또 다른 기회들도 찾아왔다. 와. 이런 큰 규모의 일에 함께할 수 있다니. 참 출세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모든 것은 딱 하나, 다른 사람들 돕겠다는 목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참 감사하다.
공감의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 없이 이 글을 끝낼 수는 없다. 그들은 정말 뿌리 깊은 친절함과 뼛속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나는 평생 미국 교육을 받은 한국인으로서 나의 대화 방법에 대해 지적을 자주 받는다. 너무 정직한 표현보다 똑같은 결론의 메시지를 전달해도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알게 되며 부드러운 전달 방법이 기분도 좋고 동시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성원 중 한 명이 경찰서에 부당하게 체포된 사례가 있었다. 이 날은 나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소식에 자원활동가를 포함한 구성원들은 주저하지 않고 하던 일을 멈추고 그 구성원을 향해 달려가 곁을 지켜주었다. 이것이 바로 팀워크이고, 오늘날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를 공감 구성원들이 본보기로 삼아주었다. 나는 내 자신의 인간성을 탓하며 ‘공감을 한번이라도 겪어봐야 인간의 완성체로 나아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배웠다. 일 년 반 동안 나에게 인내심을 보여줬고, 내가 아무리 어리석은 자신만만한 행동을 해도 나를 지켜봐주며 나만의 빛을 내뿜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경험은 나를 더욱 더 겸손해지게 했다.
물론 겸손해지는 것은 쉽지 않다. 공감에 있는 동안 나는 개인적인 비극도 많이 경험했다. 모든 면에서 오는 압박감에 쉽게 좌절할 때도 있었다. 당황한 뒤에 절망감도 따라온 적도 있다. 때로는 내 자신도 도움이 필요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는지 반문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끊임없는 시련을 겪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결국엔 내 자신의 치유를 이끈다는 것을 공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몸속에 비극을 지니고 산다. 이는 우리의 아픈 몸속에 새로운 삶이 드러나게 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기회를 준 공감에 다시 감사한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다른 모험을 위한 강력한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글 _ 김지용 펠로우,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