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 미군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 – 이나영 교수와 함께한 공감월례포럼
지난 7월 24일, 공감에서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월례포럼이 열렸다. 14년 가까이 미군 기지촌의 역사를 연구하고, 할머니들의 생애사를 기록하며, 잊힌 기억들을 잇는 작업을 하고 계시는 이나영 선생님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많은 이들에게 미군 기지촌 위안부라는 용어는 낯설 것이다. 누군가는 미군 기지촌 여성에게 ‘위안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어찌 감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과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을 함께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미군 기지촌 위안부라는 명칭은 기지촌 여성의 경험과 고통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고통과 동일시하기 위해, 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희석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동원된 언어도 은유적 표현도 아니다. 이는 지난 날 한국 정부가 미군 기지촌 여성을 범주화하던 공식적인 이름이다. 당시 정부 기록과 지방 조례 등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라는 행정용어로 지칭했으며, 언론 역시 이들을 위안부로 호명했다.
매일경제 1970년 7월 11일자 발췌 -당시 정부 기록과 지방 조례 등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라는 행정용어로 지칭했으며, 언론 역시 이들을 위안부로 호명했다.
한국 내의 위안부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것을 살피려면 한국 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한국 정부와 연합군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젊은 병사들의 성욕과 성병 감염을 관리하고자 했다. 하나는 전투력을 유지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한국의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당하지 않고, 이른바 정조를 지키는 것. 이러한 맥락 속에서 군 전용 위안소의 ‘위안부’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정부는 1948년 공창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군 전용 위안소를 유지하는 것이 불법이자, 정부 정당성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국군 전용 성매매 시설이 폐지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고, 미군의 장기 주둔이 불가피해지자 미군기지 주변에는 미군 대상의 상업을 꾸리는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57년부터 정부는 내국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미군 출입 전용 접객업소를 지정했고, 연합군을 접대하는 여성들을 특정 지역에 격리했다. 미군 헌병대는 이 지역에 대해 통제권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미군 기지촌’의 기원이다. 미군 기지촌 여성 역시 ‘위안부’로 범주화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왜 특정 지역에 격리되었을까. 답은 달러에 있다. 그 시절 미군에게 한국의 성매매 여성—특히 한국인 남성을 접대하는—은 불결하고, 성병의 위험이 있다고 여겨졌고, 한국 내 주둔 미군은 휴가 때마다 비교적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오키나와까지 가서 성매매를 했다. 경제 성장이 절실한 한국 정부로서는 일본으로 새나가는 달러가 아깝기 그지없었고, 일본만큼 ‘깨끗’하고 ‘안전’한 성매매 집결지를 만들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기지촌 여성을 특정 장소에 모으고, 명부에 등록시켜 성병을 관리하고, 위안부 자치대를 만들어 교육을 하는 등 집결지의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전후 대한 원조를 담당한 경제조정관실(OEC)이나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도 성병 통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자신의 몸을 “달라 찍는 활판기”에 비유했던 어느 기지촌 여성의 회고처럼, 기지촌은 확실히 달러를 쓸어 모았다. 게다가 ‘풍기’를 ‘문란’케하는 ‘위험’한 성매매 여성들을 보통의 ‘정숙한’ 여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부터 분리하는 부수적 효과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기지촌에는 더욱더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이 쏟아졌다. 1961년, 정부는 UN에서 만든 여성 인신매매 방지에 관한 조약에 서명 하고 동시에 윤락행위 방지법을 도입했다. 이 법은 1948년의 공창제 폐지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처벌 사항까지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2년, 정부는 성매매 단속을 하지 않는 적선지구를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이 104개 지역 대부분이 미군 기지촌 지역이고, 우리에게도 유명한 초창기 호텔들—아리랑 관광 호텔, 반도 호텔 등—도 대부분 적선지구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후 도입된 관광진흥법에서 기지촌의 클럽은 특수관광시설로 정의되어 면세 혜택을 받았고, 적선지구는 한미 친선협의회가 공동으로 관리했다. 비-적선지구에는 윤락행위 방지법이, 적선지구에서는 국가가 보장해주는 성매매가 이중적으로 작동한 셈이다. 어쨌든 정부의 적극적 지원 덕분에 미군 기지촌 수입은 한때 GNP의 25%에 달했고, 클럽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한국 전체 외화 수입의 10%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던, 기지촌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나영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사실 전후의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던 그 당시 여성의 삶은 기지촌 여성이든 아니든 간에 대체로 비슷했다고 한다. 피난, 가난, 굶주림, 인민군에게 가족이 붙들리는 수난, 가정 폭력 등. 가정 폭력에 지쳐 집을 뛰쳐나온 소녀는 인신매매를 당해 기지촌으로 흘러갔고, 의붓아버지의 성폭력에 시달리던 소녀는 취업 사기를 당해 그곳으로 갔다. 누군가는 굶는 게 지쳐 몸이라도 팔아보겠다고 갔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식모 살던 주인집 아저씨에게 성폭력을 당한 뒤 이왕 버린 몸 색시질이나 하자, 이왕이면 소문이라도 덜 나는 양색시질이나 하자며 기지촌으로 갔다.
인신매매를 당한 소녀들은 운다고, 미군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또는 미군이 사준 밥을 허락 없이 얻어먹었다고 포주가 고용한 깡패들에게 “뒤지게” 맞았다. 얻어맞은 몸에 들어가는 파스 값 한 푼, 진정제값 한 푼까지 빚이 되어 주렁주렁 매달렸다. 가난에, 가정폭력에 못 이겨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이들의 사정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포주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미군은 욕을 했고, 어떤 미군은 손찌검 했고, 누군가는 목을 졸랐다. 어떤 날은 동료가 미군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포주와 연계되어있는 깡패와 경찰이 무서워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못 하는 사람이 있었고, 운이 좋아 도망쳤다가 다시 깡패나 경찰에게 잡혀 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플 때마다, 미군에게 호객을 하는 게 망설여질 때마다 받아먹었던 진정제가 마약이었다는 것은 뒤늦게서야 알았다.
그녀들이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마담 등으로 불리며 가족이나 지역사회로부터 무척이나 천시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한국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또 다른 이름과 정체성이 있었다. ‘애국자’. 또는 ‘개인 외교관’이 바로 그것이다.
“정: 군청에서 오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기지촌에) 이마만큼 터를 닦았는데, 앞으로 이런 관광을 더 할 거다, 이렇게 맨들 거다, 이 땅에다가, 이거를 얘기를 해주는 거지. …(중략)… 그리고 나서 아가씨들이 서비스 좀 많이 해주십시오, 이러는 거야. …(중략)… 이런 거 와서 연설해는 거지.
– 현: 언니, 그 회의에 나온 사람들 중에 언니들이 애국자라고 얘기하는 거를 들어본 적이 있어? 언니들이 우리나라를 살리는 애국자라고?
– 정: 그럼! 그럼!”
(김정자 저,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p.159)
“그리고 고맙습니다, 더 좀 부탁드립니다, 이래. 그러면은 (우리는) 응응, 그리구, 미군들한테 절대 욕을 하지 마십시오, 서비스를 잘 해주십시오, 그리구 (미군이) 클럽에 들어오면은 바미드링크[술 사주세요(Buy me drink)]! 바미드링크! 이렇게 자주 해라, 이거야. 술 사달라 그러면 달러가 나오지 않냐, 이거지. 그래야지 우리나라가 번창을 한다는 거지. 그러면 아! 그런가 보다, 그러고. 우리도 부자로 한번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 그러면 어! 우리나라가 부자로 살려면은 우리가 부지런히 벌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인식이 백히는 거지. 응.”
(같은 책, p.161)
한국 정부는 이 ‘애국자’들을 추켜세우며 ‘미군에게 서비스를 잘 하라’는 교육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더불어 이 ‘개인 외교관’들이 늘 보건증을 소지할 것을 강제했고, 칸택(contact·미군 성병 환자가 성병의 감염원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지목하는 것)을 당하면 가차 없이 낙검자 수용소로 끌고 갔다. 이곳으로 끌려가면 페니실린을 맞아야 했는데, 이 과정이 몹시 고통이 커 몸이 많이 상하거나 자살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나영 선생님이 인터뷰를 했을 때도 “약을 맞으면 눈이 핑 돌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왔다고 한다. 한 나라가 애국자를, 개인 외교관을 대하는 방식치고는 너무나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제 미군 ‘위안부’이자 ‘양공주’로, 동시에 ‘애국자’로 살았던 여성들이 국내의 기지촌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조장했던 국가에 책임을 물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는 달리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미군 기지촌 문제는 전시의 성폭력도, ‘강제성’을 띤 성매매도 아니었는데, 왜 스스로 몸을 버린 여자들이 국가에 문제를 제기하느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제냐, 자발이냐’로 선을 그으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너무나도 가난해 생존마저 위태로웠던, 많은 이들이 먹고살 기반은커녕 소일거리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던 5, 60년대에 기지촌으로 간 여성은 진정 ‘자발적’ 선택을 한 것일까. 당신은 그러한 구조적 상황이 없었어도 그녀들 전부가, 변함없이 성매매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미군의 폭력에, 포주의 협박에 노출되어도, 불합리한 빚이 잔뜩 불어나도 절대 제 발로는 일터에서 걸어나갈 수 없었던, 몰래 도망이라도 치면 경찰에게 잡혀 오고 깡패에게 끌려와 구타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삶에 당신은 그렇게 손쉽게 ‘자발’이라는 선을 그을 수 있는가. 만약 기지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기지촌을 선택했다면, 불법이라고 명시된 성매매를 용인하는 지구를 따로 만들고, 성병 감염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상식적인 절차도 없이 누군가를 끌고 가 강제로 감금하고 치료한 국가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나영 선생님은 기지촌 여성과 함께한 인터뷰가 “기억과 망각 사이의 만남”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강연을 통해 사회 속에서 잊혀가던, 누군가의 경험과 기억을 나의 것으로 아로새기게 되었으니 기억과 망각 사이의 만남을 경험한 것일까.
문득 수험생 시절이 생각난다. 문학 문제집을 풀다 보면 ‘양공주’라는 단어를 종종 접할 수 있었다. 문제집 속의 ‘양공주’들은 값비싼 미제 물건을 쓰며 아이들의 선망을 받기도 했지만 지나가던 남자에게 이유 없이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동거하던 미군 병사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교재의 여백에 유명 학원 강사가 알려준 ‘전후의 비극’ 따위의 문구를 끼적이면서도 나에게는 그 ‘비극’이 좀처럼 와 닿지를 않았다. 여느 수험생이 그렇듯 읽어보지도 않은 작품의 줄거리를 달달 외우기 바빴고, 참고서 속에서만 마주할 수 있었던 그녀들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시공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수능시험이 끝났고 가지고 있던 문제집들은 전부 내다 버렸다. 밑줄을 쳐가며 외웠던, 명숙이나 매기 언니 따위의 이름을 가진 ‘양공주’들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그 때는 두 번 다시 그녀들의 존재를 마주할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사실 월례포럼을 통해 그녀들과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마주한 그녀들은 나의 시공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도 아니었고, 이제는 끝나버린 ‘전후의 비극’에 대한 은유도 아니었다. 그 때를 살아내고, 살아남은 그녀들은 지금도 나와 같은 시공간 위에 발 딛고 서 있다. 이제 나와 그녀들은 이제 다르지만 같은, 어떤 기억 하나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직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가 듣고, 응답하고, 기억할 차례다.
글 _ 김다흰 (19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