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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2020년은 원더키디의 해가 아니다

2020 우주의 원더키디.

1989년도에 방영된 국내 제작 만화영화 시리즈로,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훌륭했던 비주얼과 참신한 이야기 전개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대한민국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던 만화였다. 물론 이건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고, 당시에는 그저 짝꿍의 원더키디 자동필통을 보며 부러워했던 기억만 아련하다. 어쨌든, 원더키디 덕분에 2020년은 나에게 무척이나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2020년 우리의 현재.

지난해 12월 말, 중국의 한 도시에서 퍼지고 있다는 전염성 높은 폐렴과 같은 질병에 대한 소식이 느닷없이 날아들었을 때, 그리고 우왕좌왕 어리둥절하는 사이 1월 중순에 우리나라에 공식으로 첫 환자가 확인되었을 때도, 온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이 문제로 이렇게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이 가장 큰 확산의 원인이 된다고 하니, 이제껏 우리가 가졌던 연결과 소통의 방식을 새롭고 낯선 방식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아무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변화를 겪으며, 화생방 훈련 때나 볼 법한 달나라 착륙 복장을 일상적으로 보면서, 내 삶도 당신의 삶도 모두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비대면 비접촉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익숙해짐과 동시에, 학생들은 등교를 못 하고, 많은 직장인은 출근을 못 하게 되었다. 재택근무와, 초중등 재택 교육과, 온 가족 재택에 필연적인 삼시 세끼를 갓 데뷔한 피에로처럼 어설프게 저글링 하려니 자꾸만 공을 놓치고, 박자가 꼬이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삶을 놓치고 생업을 놓치고, 새로운 시작을 놓치고, 꿈을 놓쳤다.

요양병원, 정신병원, 노숙인 보호시설과 수감시설 등 사람들이 집단으로 생활하는 곳은 애초에 방역의 위험지대였고, 이미 열악했던 환경 속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 코호트 격리조치로 모두가 더 큰 위험 속에서 발이 묶여버린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피해 보자고 노숙인에 대한 무료 급식 제공을 중지하니, 이분들은 그나마 챙기던 하루 한 끼도 어렵게 되었다.

가족 돌봄을 병행하고 있음으로 인해 한정된 시간 저임금으로 일하는 여성들은 서비스 업종에 주로 종사하는데, 이들 직업군은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은 상황이다. 설사 일자리가 있다고 해도 유지가 어려워지기도 하고, 문을 닫은 학교로 인해 자녀가 집에 있는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돌봄 노동의 강도와 스트레스는 더욱 심할 것이다.

지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상황은 또 어떨 것인가. 공교육이 온라인 교육으로 대체되면서, 혼자 집에서 핸드폰과 미디어 시청으로 시간의 공백을 채우는 환경에 있는 아이들의 교육 격차는 어떻게 될까. 캠퍼스의 낭만이야 잠시 미뤄둔다 할지라도, 열심히 취업을 위해 달려왔던 이들의 불안과 좌절은 또 얼마나 클 것인지.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로 인하여 높아진 스트레스 속에서 가정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피할 곳 없는 아이들과 여성들, 온라인 접속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더 많이 노출되는 디지털 성범죄에의 위험. 다중이용시설 폐쇄 조치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 종사자의 고달픔. 목록이 자꾸만 길어진다.

그러고 보니 저글링을 하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보인다.

고통과 슬픔에 대한 절댓값의 기준은 헤아리기 어렵겠지만 고통이 할퀸 자리는 사회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더 깊고 진한 듯하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의 약한 곳이 어디인지를 지나치리만큼 고해상도로 보여주었으며, 공포가 다가올 때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의 권리가 가장 먼저 침해될 수 있다는 점도 뚜렷이 각인되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선 다음 할 것은 그 잔해를 치우고, 둑을 다시 쌓고, 배수로를 정비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19가 지나간 뒤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회적 재난이 닥쳐왔을 때 가장 약한 곳도 무너지는 일이 없게 하려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할까.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생각하고 실행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불확실함의 시대를 살면서 확언이라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감히 확언하고 싶다. 우리는 2020년을 원더키디가 아니라 코로나 19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겠지만, 원더키디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었던 것처럼, 몇 걸음 지나 2020년을 되돌아볼 때, 이 시기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며, 더불어 언컨택트가 그저 단절과 불편, 고립을 뜻하는 말이 아닌,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더욱 단단히 연결해주는 도구가 될 것이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긍정의 마음을 좀 더 꺼내보려고 한다.

지금 이 단절과 어려움의 시간을 잘 이겨내면, 우리는 또 새로운 힘으로 다시 연결되고,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며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주말엔 사람이 드문 숲을 찾아 작은 꽃들을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돌아오는 내 걸음에 작은 꽃씨 하나 묻어올 수도 있겠다. 집 앞 작은 정원에 떨어뜨리면 이 씨앗도 어느 날 예쁜 꽃으로 돌아오리라 믿기에, 머지않아 코로나 19가 사라진 빈자리에 활기찬 우리의 일상이 되돌아오길 바래본다.

박예안

# 국제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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