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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친애하는 후배 V에게 – 정서희 기부자

[기부자편지]

 어제는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무척 좋았어. 얼굴본지 벌써 1년, 그리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 같아 만나기 전엔 솔직히 조금 긴장했었다. 그런데 어색하기는커녕, 수업이 끝나고 학회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 다음 날 다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신기했어.
지금 네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실은 너와의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도중 마침 공감으로부터 기부자편지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야. 나 같은 무심한 저액기부자가 기부자편지를 써도 되는 걸까 당혹스럽기도 해서 돌아가는 버스에서 어떤 내용의 편지를 과연 누구에게 써야 할까 골똘히 생각했었어. 그런데 너의 이야기가 내 인상에 강하게 박혀서일지, 공감에 대한 나의 생각과 너에 대한 나의 생각이 섞여버리고 말았지 뭐야.^^
내가 요즘 다니고 있는 공감이라는 곳에 대해서 너는 물었었지. 나는 그동안 해왔던 공부를 접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시작하려는 네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고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위화감에 대해서 생각해보느라고, 네 질문엔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지만 말이야.

 정식으로 공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작년 가을, 공감의 소라미 변호사님의 강연을 듣고 나서야. 삭막하고 정신없는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얼결에 듣게 된 강연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잘 몰랐던 국내 이주 결혼 여성 문제, 그리고 그 문제를 대하는 소 변호사님의 열정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고, 그때부터 공감의 기부자가 되었어. 사실 공감의 인권전반, 여성, 장애인, 외국인, 복지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공익법 활동에 대해서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고, 재작년엔 인턴 지원을 했다가 막강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고배를 마신 적도 있었어.^^; 이렇게 써 놓으니까 계속해서 공감의 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해.
공감의 활동에 대한 관심의 계기가 있을 때가 지나면 관심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게 사실이고, 작년 강연회 때 여러 면에서 감동을 받아 공감의 기부자가 되었지만 그때의 관심과 마음이 지금까지 균일하게 이어져왔는지는 나도 의문이야. 쑥스럽지만 말이야.

 지금은 다른 경로로 한시적이나마 공감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 조금 더 가까이에서 공감을 접하게 되면서, 아까 네 얘기를 들을 때의 느꼈던 위화감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어.
너와 아까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위화감을 느낀 것은 네 말들, 그리고 생각들이 우리가 아주 예전에 함께 썼던 것들이었고 그리고 나는 점차 쓰지 않게 된 것들이기 때문이었어. ‘아름다운 것’, 그리고 ‘그래야 마땅한 것’들에 대한 그 말들, 그리고 그 생각들. 쓰지 않는 동안에도 잊지는 않았기에, 내 안에 당연히 있을 거라고 믿어왔었지. 그런데 너무 오래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너와 대화를 나누며 그 생각들이 깊은 곳에서 수면위로 붕 떠올랐을 때는 의외로 자연스러움 대신 약간의 당혹감이 섞인 위화감이 들었던 거야.
 법학을 전공으로 택한 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만 걸어온 지난 수년의 세월은 내가 법이라는 도구로 어떻게든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기대 때문이었어. 그렇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그런 초심은 나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 깊은 곳으로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공감의 여러 분들은 드러내지 않고 묵묵하게 법을 통해 길어진 두 팔로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시고 계시더라.
 더 많은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공감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떠올리고도 쉽게 잊었던 많은 가치들, 깊이 담아두곤 꺼내보지 못했던 나의 초심들이 깊은 곳에서 움찔움찔하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 것들이 떠올라와 오랜만에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느낌은 사실 편안한 것만은 아니지만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공감의 활동은 그것을 잊지 않도록 나를 계속 깨워주는 것 일 테고. 분명히 일을 하려고 다니고는 있는데, 내가 훨씬 더 많이 배워오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야. 아마 다른 기부자분들도 그렇게 공감에서 더 많은 것을 받고 계시지 않을까ς^^
 긴 시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체성과 미래를 고민하는 네게 내 편지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ς 갈림길에 서 있는 네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그 길은 ‘바로, 네가 걷는 길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어. 조만간 또 만나서 또 어제처럼 배불리 먹고 수다도 많이 떨자.                 

2008. 3. 28.   

*추신: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사이, 이젠 깍듯한 존댓말은 안 받도록 하겠어~!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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