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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_ 전현경

쉼표하나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

전현경_언니네 네트워크

요즘처럼 후덥지근한 날씨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
사실은 바쁜데 머릿속은 겁나게 심심해지면서
멍~하게 있다가 가끔 내 팔과 손이 낯설어 보였던 적이 있나요?
너무나 멍~해서 몸 여기저기를 눌러보아도 내 살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진 적은 없나요?
하루 종일 무언가를 끊임없이 했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이 내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지는 않나요?

빠져나가기 힘든 그 기분, 그 지긋지긋한 진공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차원’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한동안은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심지어는 내가 하고 있는 생각까지도 멀게만 느껴지던 어느 날이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수록 하루 종일 입이 마르고, 입맛도 떨어지고, 몸도 나른해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일수록 건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나는 명동에서 4호선을 타고, 한 정거장 후의 충무로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홍제역으로 간다.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타야 환승이 편리한지 계산할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코스이다. 항상 그렇듯이 4호선을 탔는데 시간대가 이상해서일까, 빈 자리가 많았다. 고작 한 정거장인데 뭘 앉나, 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빈 자리가 아까워서 잠시 앉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충무로를 지나 동대문운동장에 정차하는 중이었다. 아차, 한 정거장을 지나쳤군.
다행히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고 맞은편에서 바로 돌아오는 열차를 탔다. 음, 이렇게 되면 내리는 방향이 반대가 되는데, 그럼 환승방향에 주의해야겠군, 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충무로를 다시 지나버렸다. 헉, 두 번 씩이나, 나, 바보인가?
그래서 다시 돌아온 명동. 어이없기도 하지만 왠지 제자리로 돌아온 안락함이랄까. 바뀐 방향에 의한 환승역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일까? 뭔가 편안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밀려왔다. 다시 열차를 타면서는 괜히 싱글거리게 되었다. 이상도 하지.

그런데, 옆 칸에서 건너온 한 여학생이 내 옆으로 와서는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시민 여러분. 저는 한 대학생으로 그간 소심한 성격으로 고생하였습니다. 현재 제가 중요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박수 한 번 보내 주세요.”

오호, 대단한 걸! 열화와 같은 성원은 아니었지만 몇몇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었고, 옆에 있던 나는 특히나 열심히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녀는 다시 다음 칸으로 가버렸는데, 그 순간 왠지 나와 그녀의 만남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래저래 헤매인 것이 그녀와 마주쳐 박수를 쳐주기 위해 타이밍을 맞추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진공 속에 놓여있다고 느꼈던 것이, 그 진공의 방에서 빠져 나와 세상과 연결된 차원으로 옮겨온 기분이 되었다. 머리 속의 안개도 옅어지고, 난 지금 기분이 어떻다, 라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의 느낌이 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에 보면 지하철을 타고 못 타고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바뀐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나의 일상들이 지겹다면 버스 한대를 일부러 놓쳐 버리거나 평소에 가지 않았을 공간에 잠시 들러보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내가 겪을 사건들의 집합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거리라 할지라도 단지 5분의 차이를 두고서 거금을 주울 수도, 강도를 당하거나,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마주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잠깐의 시간지연에 기분이 상해서 그 이후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둘러보지 못하거나, 시간을 지키는 일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나와 연결된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상상력을 좀 더 키워보자면 한번 신호등을 건너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70살 때 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다.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겪는 매 순간은 그 수많은 가능성의 조합이 시시각각 변하는 스릴과 서스펜스의 장이기도 한 것이다.

지하철에서 내려보니, 때마침 마지막 떨이 바구니에 가득 담긴 방울토마토를 싯가에 맞지 않는 가격 3000원에 준다고 했다. 기분 좋게 사서 묵직한 봉지를 지고 걸으며, ‘아, 정말 차원을 이동해 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현경(언니네트워크 액션나우팀) : 공감과 공감하고, 공감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은데, 말장난이 너무 심했나? 이 글은 언니네(www.unninet.co.kr)의 제 자기만의 방(블로그)에 있는 글입니다. 공감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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