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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차별받는 모두를 위한 차별금지법을 만들기 위해 – 케이

[공감칼럼]

차별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을 만들기 위해

케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일곱 개 차별 금지 영역의 삭제

‘성적지향,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이와 같은 일곱 가지 항목은 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발표한 입법예고안의 차별 금지 대상의 목록에 성별, 장애, 인종 등의 다른 항목들과 같이 멀쩡히 잘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입법 예고 한 달여 만에 이 항목들은 법안으로부터 한꺼번에 삭제되었다. 일곱 가지 항목 삭제와 함께 ‘성별’에 대한 정의 조항 또한 사라졌고 이는 실질적으로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매개로 한 차별 역시 법안의 최종안에 차별 금지 대상으로 포함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헌법 및 국제 인권규범의 이념을 실현하고 전반적인 인권 향상과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인권보호를 도모함’을 차별금지법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했던 법무부의 태도가 실로 상당히 기만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해서는 안 되는 대상과 차별해도 괜찮은 대상이 국가에 의해 또렷이 갈라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성소수자차별저지긴급행동’

성소수자 진영은 기본적으로 ‘성적 지향’ 항목이 삭제된 데에 시급히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10월 31일, 11월 5일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이 사안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번개’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각각 칠십 여명, 백오십 여명에 육박하는 참가자(그 중 대다수가 성소수자들이었다)가 모여 차별금지법안의 현행 최종안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데 반대하고 올바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공동’의 실천을 결의했다. ‘성적지향’이란 항목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 및 법무부가 내놓았던 애초의 입법예고안에 일관되게 담겨 있었던 터라, 최종안에 ‘성적지향’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성소수자 진영에 큰 충격과 분노일 수밖에 없었고, 대규모의 번개 참가자 수는 이 점을 명백히 드러내 주었다. 성소수자 및 지지자들은 2차 번개를 통해 만든 ‘성소수자차별저지긴급행동’(www.lgbtact.org)(이하 ‘긴급행동’)이란 이름으로 ‘성적지향’ 항목 및 기타 일곱 개 항목(성별 정의조항 삭제로부터 비롯된 트랜스젠더 권리문제 배제까지 포함한 가짓수) 삭제에 대항하는 활동을 현재까지 열띠게 펼쳐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싸움에는 성소수자 단체뿐 아니라 국내의 광범위한 인권 운동 진영과 여성 운동 진영, 그리고 해외의 개인 및 단체들이 지지, 연대하고 있다.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보수기독교 세력과 원칙 없는 정부

법무부가 ‘성적지향’ 항목을 차별금지대상 목록으로부터 뺀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입법 예고 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난 보수기독교 세력 및 사회 기득권층의 정부에 대한 압력 행사였다. ‘동성애차별금지법안저지를위한의회선교연합,’ ‘동성애반대국민연합’ 등은 이번 차별금지법안 입법예고 이후 급조된 동성애 혐오 조직들로, 이들은 단순히 신앙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유력인사들로서 동성애란 ‘해악한 것’임을 대사회적으로 선전했으며 엄청난 인적 동원력 및 전파력으로 법무부를 압박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힘은, 수년간 법안에 담겨 있던 ‘성적지향’   이란 항목을 법무부가 한 달 만에 자진 삭제하게 할 만큼 컸고, 우리를 이들이 저지를지 모를 혐오 범죄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물론 이들이 벌인 이제까지의 동성애 반대 활동 자체가 혐오 범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황이 분명함에도 법무부는 현행 법안에 남아있는 열세 가지의 항목들이 차별금지대상이 되는 것의 ‘예’를 들어주는 조항일 따름이라, 이번에 몇몇 항목이 빠졌다고 해서 그 항목들이 법적으로 차별받아도 되는 거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지금 우리들이 ‘성적지향’ 및 삭제된 기타 조항들을 법안에 원상복귀 시키라는 활동을 하는 걸 내심 반기고 있는 듯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원상복귀 시키라는 운동이 지속되는 한, 자신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보수기독세력이 법무부가 실제로는 ‘성적지향’에 대한 차별을 금지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입장인 것이다. 이는 당연히도 어불성설이다. 차별 피해 구제를 가장 필요로 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법안에 명시하지 않는 한, 성소수자들의 경험은 다시금 비가시화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 보장이 명시돼 있는 차별금지법을 원한다.

폭넓은 연대의 즐거움  

  이렇게 시국은 수상하지만, 지금 ‘긴급행동’은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총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번개,’ ‘긴급행동’의 발족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들이 개인, 단체 가릴 것 없이, 심지어 국내 거주자와 해외 거주자조차 가리지 않고 연대하여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는데, 이 규모와 활동력은 아마도 지난 십 사년 여간 다져온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의 토대로부터 나오는 저력이 아닐까 싶다. ‘긴급행동’으로 모여든 백 명이 훌쩍 넘는 (그보다도 셀 수 없이 많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활동가들은 저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며 서로를 북돋는 과정을 통해 차별반대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디자인에 솜씨가 좋은 사람은 웹 홍보 자료를 제작하고, 행사 기획에 흥미를 가진 사람은 오프라인 캠페인을 기획하며,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국제적인 연대를 호소하는 작업을 하고, 정부와 국회 쪽으로 밝은 이들은 그 쪽 정보를 수집하며 대응을 모색하는 식으로 저마다 제 자리에서 빛을 낸다. 임기 말년의 노무현 행정부가 앞으로 과연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설사 그들이 아무리 성과주의적으로 법안을 졸속 통과시키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불어 만들어 낸 이 싸움들은 오롯이 우리 자신의 자긍심으로 남을 거라 생각하며, 피로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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