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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감칼럼# 주거권# 청소년

“집 가는 즐거움” 하나쯤은 – 가정 복귀와 시설 사이에 놓인 청소년의 주거권

2년 전 이맘때, 종로의 한 고시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11월 9일, 하필 ‘소방의 날’에 찾아든 화마는 일곱 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나는 늦은 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홈리스행동의 이동현 활동가를 통해 화재 소식을 접했다. 큰불이 났는데도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고, 고시원엔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유일한 출입구에 불이 붙으면서 혼비백산한 이들은 창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창문이 있는 방에 살던 분들은 살았고 창문도 없는 방에 살던 분들은 목숨을 잃었다. ‘거리보다는 낫겠지.’ 이동현은 생노숙을 하고 있던 홈리스들에게 고시원에라도 들어가시라 안내했던 자신이 마치 살인자처럼 느껴진다고, 슬픔을 짓누르며 말했다. 살아생전 누지고 컴컴한 한두 평짜리 방에서 삶을 꾸렸던 이들이 화염에 휩싸여 울부짖었을 마지막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불이 나서 죽은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없었기에 죽어야 했던 목숨들. 적정 주거기준은 고사하고, 집도 아닌 곳에서 사람이 살도록 내버려두는 이 사회의 야만에 대해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곤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부자나라인데 그런 공간에 사람이 산다는 게 놀라웠다.” 그해 봄, 한국을 방문한 ‘유엔 적정주거 특별보고관’ 레일라니 파르하가 쪽방과 고시원을 둘러보고 했다는 말. 그에게는 놀랍기 그지없는 공간이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저 안타까운 인생들이 머무는 아쉬운 주거공간쯤으로 여겨지는 곳이 고시원이었다. 고시원을 없애는 대신 고시원에 스프링클러와 창문을 다는 일만이 전부인 것처럼, 일곱 명의 우주를 앗아간 사건은 소비되었다. 고시원과 같은 비적정 주거공간과 그곳에 몸을 누이는 삶들을 잠시 잊는 게 아니라 잠시만 떠올리다 마는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쉼터 생활의 끝에 다다른 고시원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에서는 탈가정 청소년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응원하고 있다.

 

고시원 이야기는 최근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탈가정 청소년 (‘가정 밖 청소년’이라는 명칭은 얼핏 중립적 표현인 듯이 보이지만, 가정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상태를 비정상적이거나 위기적으로 호명하고 있다. ‘가출 청소년’ 역시 가출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비행의 낙인이 덧씌워져 있다는 점에서 ‘탈가정 청소년’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여 쓴다. 그 벗어남(脫)엔 ‘추방’과 ‘탈출’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들의 삶을 통해 다시금 찾아왔다. 탈가정 청소년은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가족환경에서 추방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상황을 견디지 않고 살기 위해 벗어나기를 선택한 저항자이기도 하다. K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와 집을 나온 뒤 둘이 살았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여러 쉼터를 옮겨 다니며 살았던 그가 지금 머무는 곳이 고시원이다. 고단한 삶을 이어왔을 그가 쉼터 생활의 끝에 다다른 곳이 고시원이라는 사실에 가슴에 휑한 바람이 일었다. 고시원은 보증금이 없는 대신 월세가 세다. 좁고 남루한 고시원에서 빚어나오는 소음들과 여럿이 함께 여닫는 냉장고는 크고 작은 다툼의 불씨가 되었다. 옆방의 기침 소리도 들리는 방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다 이웃과 다툰 적도 있었고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잃어버리는 일도 잦았다. “냉장고에 자물쇠를 채울 수도 없고.” 냉장고와 자물쇠라니, 이 어이없는 낱말의 조합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곳이 고시원에서의 삶이었다.

K가 쓸쓸하고 가난한 삶을 의탁한 고시원이 그의 집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이라 불러서도 안 된다. 국일고시원 화재 이후 정부가 오래된 고시원에 스프링클러 설치를 지원하겠다며 손댄 법률도 주택법이 아니라,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이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은 아프면 집에서 3~4일 머물라고 말하지만, 정작 고시원은 사는 이들에게 위험하기 그지없는 밀집 시설이다. 그런 고시원마저 대다수 탈가정 청소년들에겐 언감생심이다. 탈가정 청소년이 높은 월세를 감당할 만큼의 소득을 벌 기회나 자리를 찾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돈이 있어도 계약이 막힌다. 비청소년의 명의를 빌려 방을 계약하는 이들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다.

 

보육원에서 쉼터로, 다시 거리로

L은 서울의 한 보육원에서 열네 살까지 살다 규칙을 자주 어긴다는 이유로 대구의 한 쉼터로 옮겨졌다. 보육원은 한마디로 “선이 없었다.” 한방에서 여럿이 생활하다 보니 침범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다툼도 많았다. 종사자나 언니들에게 맞는 일도 잦았다. L은 보육원 안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보육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애들을 가둬놓는” 것도 싫었고, 똑같은 옷을 입히는 것도 싫었다. 종사자들의 시선, 관리 방식, 동네와 보육원을 가르는 담장까지 보육원의 모든 공기가 고아를 부끄러운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규칙을 넘나드는 그의 몸은 ‘보육원이라는 시설이 문제’라고 말했지만, 보육원에서는 그의 행동거지를 문제 삼았다. “난 싫다고, 난 안 갈 거라고 말했는데 이미 샘들이 짐을 다 싸놨고 저도 모르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더라구요.” 행선지도 모른 채 종사자들이 싸놓은 짐과 함께 낯선 지역의 쉼터로 보내졌다는 그의 이야기에 목울대가 따끔따끔 부어올랐다. 그렇게 옮겨간 쉼터에서 그는 6개월 동안 캐리어에 담긴 짐을 풀지도 않고 지냈다고 한다.

쉼터도 보육원과 생리는 비슷했다. 낯선 사람들과 여러 명이 함께 살아야 했고, 식단도 잠자는 시간도 내가 정할 수 없었다. 친구를 초대할 수도 없고 내 마음대로 꾸밀 개인공간도 없었다. 쉼터의 규칙도 몸과 마음을 꽁꽁 묶는 기분이었다. 고시원엔 내 음식을 채워둘 냉장고라도 있다면, 쉼터는 보육원과 마찬가지로 냉장고 하나도 마음대로 열 수 없는 곳이었다. 몇 번이고 쉼터를 뛰쳐나왔다 마음도 몸도 둘 곳이 없어 다시 쉼터를 찾아가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외부에서 손님이 올 때면 내 손님도 아닌데 시키는 청소를 해야 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쫓겨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어요.” L의 이야기는 “말로만 쉼터”일 뿐 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또다른 L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었다.

물론 L에게 좋았던 쉼터가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규칙을 어기고 무단외박을 해도 하염없이 기다려준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자유와 안전을 찾아 집을 나온 탈가정 청소년들에게 집 밖의 시간은 지독히 불안하고 외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너의 자리가 여기에 있다’는 듯 기다려주는 사람의 존재가 그래서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종사자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쉼터라고 해도 그곳이 집이 될 수는 없었다. 쉼터에서의 거주 기간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 나가야 하는 걸 알고 있다면 내 집은 아니죠.”

 

집 가는 즐거움하나쯤은

탈가정 청소년들이 들려준 주거 역사에 등장한 이야기 소재들

 

그 집은 나를 위한 집이 아니기에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거리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이 사회가 제공하는 쉼터나 보육원은 잠을 잘 수는 있어도 집다운 집이라 보기는 어렵다. 탈가정 청소년들의 대다수가 가정 복귀도, 시설 입소도 원치 않는 현실은 그 자체로 현 청소년 ‘보호’ 정책의 실패를 증명한다. 원하지 않는 방식의 보호는 굴레가 되어 청소년들을 더 아슬아슬한 자리로 내몬다. 같은 주거 위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 홈리스라 할지라도 보육원을 중도 퇴소하거나 쉼터에 거주한 이들에게 공공임대주택은 하늘의 별따기다.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위험한 주거와 관계를 감내하거나 집을 얻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집을 나왔어?” 그들이 고통스럽게 집에서 살 때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들이 살기 위해 집을 나온 청소년에게 이렇게 호통 치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 한 청소년이 건넨 곱디고운 말처럼 누구에게나 “집 가는 즐거움” 하나쯤은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대(大)자로 뻗어 누울 수 있는 집, 같이 사는 이의 물건을 훔치지 않아도 되는 집, 폭력이 없는 집, 집들이에 친구를 초대하고 하룻밤 재워줄 수도 있는 집, 나만의 색깔로 꾸밀 수 있는 집, 그래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는 집. 그런 집이 나에게도 필요하듯, 청소년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집은 인권이고 인권이 되어야 한다. 집을 디딤돌 삼아 꾸깃꾸깃해진 삶을 다림질하고 다양한 빛깔의 삶을 펼쳐갈 지원서비스가 결합되는 방식의 ‘보호’가 절실하다.

보건복지부 ‘보호대상아동 현황 보고’에 따르면 현재 보육원과 공동생활가정(그룹홈)에서 살아가는 18세 미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1만4천여 명이다. 2019년 쉼터에 입소한 청소년의 연인원은 3만2,402명이다. 2017년 10월 여성가족부는 실제 탈가정 청소년의 수를 27만 명으로 추산한 바 있다. 2019년 10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에 단계적인 탈시설 계획을 수립할 것을 권고했다. 시설은 인권을 보장하는 공적 보육의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부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다.

 

글_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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