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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단체탐방_동성애자인권연대

21″ hspace=”10″ src=”//newsletter/images/070706/news_070706_13.gif” width=”136″ align=”left” vspace=”5″ alt=”” />”이 땅의 권력 구조에서 소외된 모든 성적 소수자들의 동등한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인권 단체로서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 그리고 모든 유형의 불평등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 http://www.outpridekorea.com/)가 규정하는 활동의 첫 번째 원칙이다. 실제로 지난 6월 2일 열린 제 8회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또 그 일주일 후 동인련 주최로 이틀간 진행된 성소수자진보포럼에서 동인련 활동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두 개의 큰 행사를 치루어내느라 다소 –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권 활동이 대개 퇴근 이후의 길지 않은 시간을 이용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하면 더욱 – 피곤해 보였지만, 지치지 않는 목소리로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철폐와 에이즈 감염인의 인권 보장을 이야기하던 동인련의 사무국장 병권씨를 만나보았다.

먼저 ‘동성연애자’, ‘호모’, ‘게이’ 등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들이 다양한데 이 중에서 동인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언어와 그 이유, 그리고 동인련의 운동방향 등 기본적인 질문들로 인터뷰의 문을 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성과학이 대두되면서 성적지향성에 대한 구분이 생겨났다. 18세기 후반 벤케르트라는 의사가 처음으로 ‘Homosexu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동성애를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 일반인(이성애자)와 구분하기 시작했다. 과거 동성애를 이상적으로 본 그리스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동성애는 엄연히 존재해 왔지만 19세기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소수인 집단을 특정화하고, 분류해내 낙인을 찍어 계층화 시키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 때 동성애자 역시 정상에서 벗어난 변태나 병자로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병권씨는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역시 ‘사랑(愛)’이 관계의 기본이기 때문에 단지 성적취향 때문에 동성의 몸을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동성애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이를 권장한다고 했다.

그동안 동인련은 사회에서 바라보는 소위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않거나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동성애자, 양성애자, 자웅동체 등) 모든 사람과 함께 해왔다. 병권씨는 많은 사람들이 단체 이름에 ‘연대’가 들어있어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이 연합한 단체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 ‘연대’의 의미는 숫자적, 개념상으로의 연대가 아니라 우리와 같이 상대적으로 소수의, 또 소외받는 자들과 단체들, 그들의 주장과 함께 사회의 진보적 흐름에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1991년도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사건으로 시위운동에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 처음으로 레인보우 깃발을 사용하면서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동인련의 시초에서 기인한 의미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도래로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었다. 이에 19세기 말경 유럽에서 히르쉬펠트를 선두로 동성애자 권리투쟁이 시작, 1980년 초 AIDS가 등장하기 전까지 매우 활발하게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동성애자인권운동의 역사는 어땠는지 또 그 흐름에서 동인련은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궁금해졌다.

병권씨는 한국의 경우 1980년대부터 대중의 의견표출욕구가 분출되면서 동성애자인권운동은 곳곳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성정치담론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운동에 불이 붙었다. 특별히 동성애자들은 PC통신을 통해 집결했으며, 또한 대학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다른 것들에 대하여 개방적인 대학생들 사이에서 동성애자인권이 논의되었다. 연대와 서울대에서 모임을 갖고, On-line상에서 활동하던 PC통신회원 동성애자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투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동성애자 인권단체로는 1994년 한국최초 동성애자 모임인 ‘초동회’가 있었고, 여기서 분리되어 나온 ‘친구사이’(남자동성애자모임)와 ‘끼리끼리’(여자동성애자모임)와 ‘또 하나의 사랑’(하이텔 동성애자 모임), ‘대학동성애자연합회’ 등 자생적인 동성애자 단체들이 95년부터 생겨났다. 이후 97년 노동법개악시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하는 동성애자연대투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여러 단체들이 연합하여 투쟁대열에 합류했고, 이 때 동인련도 운동에 합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동인련은 대학 강연과 토론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특별히 AIDS관련 교과서 개정(동성연애자들이 AIDS확산의 주범이다라는 내용), 청소년 윤리교육 등을 중점적으로 진행하면서 동성애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2000년에는 홍석천씨 커밍아웃 지지및 인권유린중단 운동, 2001년 정보통신부윤리위원회 앞에서 진행된 동성애자차별반대공동행동, 2002년 청소년보호법상 동성애 사이트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 반대시위, 2003년 고 육욱당 추모예배(한국기독청년연합 주최) 및 한국기독총연합에 항의방문, 2004년 반전운동 참여, 2005년 청소년 동성애자 문제 이슈화 사업 및 사범대생(예비교사) 준비교육 프로그램 실시, 상담원양성 프로그램 실시하였고, 2006년부터 현재까지는 AIDS 관련 여러 단체와 연합하여 공동행동화하고 감염인인권보호도 이슈화 하는 활동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인터뷰 전 사전조사에서 동인련의 여러 활동 중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대표적인 것으로 ‘예비 교사와 함께 하는 동성애 워크샵’ 개최와 동성애자의 차별과 인권에 대한 대학 강연이 있었다. 인식변화에 아주 실질적이면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던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좀 더 들어보았다. 특히 예비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워크샵은 정서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힘겨워하는 청소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03년과 2006년에 열렸던 이 워크샵에서 병권씨는 예비 교사들의 동성애에 대한 좀 더 열린 시각, 또는 동성애를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미래의 학생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을 보았고, 여기서 우리 사회의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느낀다고 했다. 최근 경제 위축 등의 요인으로 일반인, 특히 다양성에 가장 열려 있어야 할 대학생들의 가치관이 예전에 비하여 다소 보수성을 띠는 경향이 있어 대학 강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건네기가 조심스러워졌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사회의 인식 변화, 또는 “진보”를 바라보는 동인련의 구체적인 상담 교육이나 강연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이에 더하여 청소년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청소년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Pride Party’이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폐쇄성 때문에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나이에도 커밍아웃이 쉽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성소수자가 겪는 마음의 고통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자기 혐오나 학내에서의 교사 또는 친구에 의한 정신적·물리적 폭력으로 정신 병원을 찾거나 자살에까지 이르는 청소년이 있음을 고려할 때, 이들의 고민에 귀기울이고 힘을 실어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을 발견토록 하는 Pride Party가 아직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크지 않은 현 시점에서 한국 성소수자 인권 활동의 다음 단계를 이끄는 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덧붙여, 병권씨는 청소년의 성 정체성 고민 및 그에 대한 결정을 인정할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와 바른 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요즘 이슈화 되고 있는 동성혼·동성 파트너쉽 인정, 공동체 구성권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 인정 필요성과 관련하여 가족 구성권에 대한 동인련 대표로 인터뷰에 응한 병권씨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었다. 언론 매체를 통해 외국의 동성혼 합법화를 위한 동성애자의 시위, 결혼식 장면 등을 드물지 않게 접했기 때문에 병권씨 또한 이와 비슷한 시각을 가질 거라 예상했는데,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었다. 동인련 입장에서도, 개인적인 견해로도 가족 구성권 관련 활동은 당분간 계획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 소수자의 인권이 어느 정도 인정되는 상황에서 HIV 치료와 관련하여 그 구체적인 필요성이 제기되고 제도화가 먼저 이루어진 외국의 가족 구성권 활동과 달리,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서는 가족 구성권 활동에 앞서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더불어 병권씨는 동성애자의 결혼에 대한을 생각을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가족 구성원 문제 역시 양육과 같이 국가가 일정 부분 분담해야 하는 책임을 가족에 전가하는 것 등 우리나라 결혼 제도의 전반적인 문제점이 개선되는 큰 틀 안에서, “사회 진보의 방향으로 국가의 책임에 대한 논의를 우선”하여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6월 퀴어문화축제에 퍼레이드에 참여했던 우리들은 퍼레이드에서 외쳤던 많은 구호 중 “AIDS 주범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다국적 제약회사다”라는 것이 낯설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언뜻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구호의 의미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AIDS약을 만드는 다국적 제약회사는 대학 연구소 등에서 개발된 신물질을 일단 적은 돈을 들여 사들여 회사 이름으로 ‘특허’를 낸다. 이 특허권을 가지고 아주 높은 값으로 약을 공급하기 때문에 약의 수요가 많음에도 약값이 높아 제대로 약을 먹지 못해서 AIDS가 더 확산되는 것이라고 병권씨는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높은 약값으로 벌어들이는 어마어마한 수입으로 제약회사는 다시 새로운 연구의 실적을 사들이고, 특허를 위한 공격적인 로비를 통해 제약회사의 AIDS약에 대한 독점에 가까운 횡포가 멈춰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에 더해 병권씨는 태국의 예를 소개하며 제약회사들의 횡포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많은 AIDS 감염인구를 가진 태국정부는 한 때 너무 높은 약값이 부담되어 수입을 제한하겠다고 했다. 이에 제약 회사는 부랴부랴 약값을 낮춰 약을 넘기면서 대신 약의 냉장보관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결국 약의 원가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이었으며 싼 값으로 넘긴 약이 사실 유효기간이 얼마 안남은 약이었음에도 싼값으로 선심 쓰듯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넘긴 것이었다. 이러한 다국적 제약회사의 약값횡포에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부는 현재 10여개의 AIDS약 중 단 2개만을 정식으로 수입하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제3세대 약이라고 불리는 신약은 정부가 제시한 가격(2만5천원)이 낮다며 다국적 제약회사가 (4만원이하로) 약을 팔지 않아 전혀 수입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병권씨의 지인을 포함해 이미 1세대 약을 먹고 내성이 생긴 환자들은 2세대 약을 먹고 있는데 이것도 2종류뿐이라 2세대 약에 내성이 생긴 환자의 경우 약을 구하지 못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정식으로 수입이 되지 않는 약은 희귀약으로 분류되어 외국에서 구해오는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환자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더하여 경제적 고통도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임에도 정부는 약을 빨리 들여올 생각은 하지도 못한 체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권에만 끌려 다니고 있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제약회사의 약값 횡포를 제외하고 현재 AIDS에 감염된 환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일들은 무엇이며 가장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병권씨는 병원시설부족과 AIDS 감염자들의 처우개선을 첫째로 꼽았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병원들도 이미 돈이 되는 환자들만 돌보는 경향이 짙어 결국 치료가 어려운 희귀병 환자들만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며 특별히 AIDS 감염된 환자들의 경우 국내에서 AIDS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병원이 9개 밖에 없고, 그나마도 치료실과 병실이 터무니없이 작고 부족해서 감염인들의 수요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반병원의 경우 환자의 AIDS 감염 사실을 알게 되자 치료는커녕 조용하게 돈을 주며 다른 병원으로 가달라는 경우까지 있어서 AIDS감염 환자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AIDS의 감염시 검사는 익명으로 하게 되지만 환자의 감염사실을 병원 기록부(chart)에 남기고 관리는 실명으로 하게 되어있어, 환자의 익명성이 전혀 보호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지적했다. 일례로 병원 수납을 위해 기다리던 한 AIDS 감염 환자에게 병원직원이 기록부를 보고 “AIDS환자세요?”라며 큰소리로 말해 그 환자는 수납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괴로워해야 했다고 한다. 병권씨는 AIDS에 감염된 환자들의 경우 다른 이들처럼 치료에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감염 사실을 안 순간부터 숱한 편견과 터무니없이 부족한 의료시설 때문에 괴로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AIDS감염의 예방정책에만 집중하고 있다. 1988년 한국에 총 4명의 AIDS 감염인이 있을 때 만들어진 AIDS예방법이 여태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동인련은 AIDS 감염인들의 치료를 돕는데 더 많은 예산을 할애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오고 있다. 이미 병에 걸린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병원과 시설의 확대 및 더 많은 종류의 약을 들여올 것 등을 가장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다. 병권씨는 AIDS 감염인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예방정책만 고수하고 있어봤자 AIDS의 확산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병권씨는 동인련에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고 꼭 전해달라고 말했다. 동인련은 정부나 기업의 후원은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개인의 후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AIDS 감염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함께 대항할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대한다.

10여 년에 걸친 동인련의 활동에서, 그 곳에 몸담고 있는 병권씨에게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보다 나와 다름을 두려움이나 편견 없이 따뜻하게 바라보고 공존할 수 있는 가족애였던 것 같다. 무지개 무늬 넥타이를 매고 동인련의 성소수자진보포럼에 참석하여 자신이 경험했던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편견과 아픔을 이야기하던 너무나 진솔하고 밝은 연사님이나, 통상 에이즈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활동가님이 에이즈 예방법 개정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또 이 두 분과 병권씨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아끼며 룸메이트로 함께 지내는 모습은 법적으로 인정되지만 가정불화나 다른 이유로 그 기능을 잃은 사회 통념상 ‘정상적인’ 가족보다 훨씬 가족적이었다. 어떤 활동가님의 말처럼 ‘10년을 바라보고 하는 인권 활동’에 그들의 조용하지만 끈기 있는 목소리가 온전히 스며들어 사회의 시선을 좀 더 따뜻하게 바꾸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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