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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 칼럼] 전쟁 시기 학살 현장에서 생각한 인권 –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박산골. 전쟁 무고한 민간인이 광기 서린 국군에 의해 517명이나 학살당한 경남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의 조그만 골짜기 이름이다. 지난 7월 1일 인권천릿길기행에 참여한 일행들과 박산골에 들어섰다. 여느 계곡이나 다를 곳 없는 조그만 계곡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서너 개의 돌이 계곡 기슭에 보였고, 그 곳에 총탄자국이 60년도 넘는 세월이 지났건만 뚜렷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어떤 게 소총 자국일까, 조금 크게 팬 자국은 기관총탄 자국이 아닐까. 무심하게 버려진 학살현장에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찬 기운이 온몸을 휘감으면서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선다. 얼마나 불안했을까?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갔을 그 원혼들의 아우성과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둘도 아니고, 5백 명 넘는 사람들, 그중에 15살 미만의 아이들이 2백 명도 넘었다니…. 시체더미 위에 청솔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 버렸고, 아이들의 시체만 딸 걷어서 2km 떨어진 홍동계곡에 암매장했다는 그곳이었다.


 


거창추모공원 맞은편 합동묘소가 길옆에 있었다. 군은 3년 동안 학살 현장에 접근도 못하게 막아서 54년에야 겨우 박산골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수습된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서 큰 뼈는 남자, 좀 작은 뼈는 여자로 분류하고, 아주 작은 뼈들은 아이들 것으로 모았다. 그리고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소아합동지묘’로 합장하여 봉분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건 당시 국회 진상조사단에 인민군을 가장하여 총질을 하여 조사도 못하고 돌아가게 만들고, 군사법정에서 무기징역,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이들을 이승만이 사면시켜준 것으로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군대는 5월 18일에 거창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구속하였고, 6월 25일에는 박산골 합동묘지를 파헤쳤고, 가까스로 세운 비석도 깨서 땅에 묻었다.


 


1967년에 가까스로 합동묘소를 수습했지만, 어린이 묘는 봉분을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유족들은 끈질긴 명예회복 투쟁을 벌였고, 1996년에서야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을 만들 수 있었다.


 


산청과 함양, 그리고 거창에서 일어났던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킨 군대는 11사단 9연대 3대대였고, 사단장은 최덕신, 연대장은 오익경 대령, 대대장은 당시 25살의 한동석 소령이었다. 이들은 박산골에서만이 아니라 1951년 설날 직후부터 산청, 함양, 거창 등 지리산 자락을 돌면서 피의 학살 행진을 계속했다.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 학살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김운섭 거창유족회장의 나이는 올해로 만 70세다. 그의 나이 9살 때 청연마을 인근의 내동에서 군인들을 피해 감악산을 넘어 거창으로 가다가 아는 분의 집에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마을로 들어온 군대는 다짜고짜로 집마다 불을 질렀고, 주민들은 마을 앞 논으로 몰아세웠고, 그곳에 84명을 죽였다. 그의 어머니는 마침 기관총 앞에 쓰러져 총알을 다 맞아서 얼굴 반쪽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혔던 두 살배기 동생도 죽었고, 그의 형도 죽었다. 그는 시체 더미들 아래 깔려서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시체를 치워내고 살았다고 한다.


 



그날 눈이 시리도록 흰 눈이 무릎까지 빠지게 내렸는데, 갓난아이 하나가 엄마 등에 업혀 있다가 눈밭으로 기어 나오더란다. 그런 아이를 군인이 군홧발로 공을 차듯이 걷어차서 시체더미에 차 넣으면서 “에이, 더러워!” 그러더란다. 흰 눈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갔던 사람들, 평화롭기만 한 산골에 요란하게 울리던 총성들…골골마다, 산하마다 억울한 죽음들이 1백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아직도 많은 사건은 미궁에 묻혀 있다.


 


그러면서 이런 죽음의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거듭 생각했다. 기억하려는 자와 기억을 지우려는 세력의 치열한 투쟁이 지금 이 나라에서는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이승만이 말했던 것처럼 “부끄러운 치마 속”이라며 범죄를 감추고 왜곡하려는 자들이 지배한 이 나라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동행하면서 길 안내를 해주었던 김동춘 교수의 말마따나 그렇게 감추어진 역사는 지금까지 우리를 옥죄고 있음이랴.


 


지난해 제주도에서 분단현장까지 보름 동안 인권현장을 기행하면서 오감으로 느꼈던 것은 청산하지 않은 역사는 잔인한 국가범죄를 계속 양산한다는 점이었다. 쉽게 생각해보면 일본 강점기에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파들이 이승만과 미제의 앞잡이가 되어 제주에서 3만 명 넘는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전쟁 시기에는 백만 명을 학살했으며, 4·19 때도, 5·18 때도 학살을 했다. 군대와 경찰이라는 국가의 합법적 폭력은 청산되지 않은 지배세력의 수중에 있었고, 그런 군대와 경찰에게 죽여도 좋은 국민이 아닌 사람들은 때가 되어 필요하면 죽여도 좋은 대상이 되고는 했던 것은 아닐까? 좀 더 생각을 비약해 보면, 그런 그들이 장악한 권력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용산에서도, 쌍용자동차에서도 그리고 매년 1만 5천 명이나 자살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제의 적산을 가로채서 자본을 축적한 이들이, 미국의 원조물자로 다시 부를 늘리고, 전쟁 때는 군수품 장사로 한 목 톡톡히 채웠고, 독재정권에는 정경유착해서 재벌이 된 이들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세력이 되어 있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권운동이 추구하는 가치가 자유와 평등, 평화라면 만연한 폭력과 차별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다져온 기득권 세력의 본질을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인데, 결국 처벌되지 않은 역사를 가진 이 사회에서 과거 청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인권현장을 찾아 떠나는 인권천릿길기행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다음에는 어디? 소록도를 찾아가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차별, 배제의 역사적인 구조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서대문형무소, 남영동 대공분실, 남산 안기부터를 잇는 인권기행도 하반기에 가져보려고 한다. 백 권의 책보다, 잘 만들어진 영상보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인권공부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다는 생각이다. 인권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인권현장기행은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권천릿길기행을 기획한 일은 참 잘한 일이다.


 


글_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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