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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 칼럼] 그 때 그 사람들과 오늘 이 사람들




 


전두환 정권의 발악이 말기증상으로 치닫던 1986년 여름이었습니다. 많은 학생운동 출신의 젊은이들이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려고 서울과 인천 등지를 떠돌 때였습니다. 뙤약볕 내리쬐는 공단거리를 서성대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소식을 들었습니다. 피가 솟구쳤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절엔 별의별 흉악한 일이 다 있었으니까요.



그 얼마 전 김근태 씨가 당한, 듣기만 해도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끔찍한 고문 장면을 자세히 묘사한 유인물이 돌기도 했고, 대공과 형사들에게 끌려간 뒤 철로변 같은 데서 주검으로 발견된 사람들에 관한 소문도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어느 한여름 밤, 발가벗겨진 제 몸이 칠성판 위에 꽁꽁 묶여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위에 눌려 깨어난 뒤에도 꿈과 현실이 잘 분간되지 않을 만큼 살기가 감도는 세상이었지요.



아무튼 부천서 사건을 제대로 전한 것은 누런 갱지에 흐릿하게 복사된 ‘유인물’뿐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짤막한 사회면 기사로만 내보내던 신문과 방송들이 어느 날 검찰 수사결과 발표라는 걸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한 운동권의 날조 사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뻔한 수작이었지요. 그리고 참으로 뻔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뻔한 날조문서를 읽고 있던 검찰 간부들, 그 앞에서 플래시 터뜨려가며 사진 찍고 뻔한 기사를 썼던 신문∙방송사 기자들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검찰은 뻔한 각본에 따라 고문경관 문귀동의 범죄혐의를 기소유예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법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조영래 변호사 같은 분들이 검찰의 불기소에 대해서 한 재정신청을 기각했고, 피해자 권인숙 씨에게는 실형까지 선고했던 겁니다.



최근 우리나라 사법부의 역사를 새로 파헤쳐서 쓴 연재기사(한겨레신문,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에, 오랜 세월 안개 속에 묻혀있던 그 비열한 음모의 현장이 낱낱이 드러나 있더군요.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정권의 존립과 직결되는 사건이니 공권력 마비를 위한 공산세력의 조작’으로 몰아가도록 조작을 총지휘한 안기부장, 맞고소 따위의 잔머리를 굴리는 한편으로 지검장을 윽박질러 조작을 지휘하고서는 일이 잘 끝났다고 거액의 격려금까지 내려보낸 법무부와 내무부의 장관들과 검찰총장, 변호인과 기자들 앞에서 ‘나중에 결과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공정하게 수사를 했는지 알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던 공안검사, 카메라 앞에서 안기부가 써준 검찰 수사결과 발표문을 천연덕스럽게 읽어내려간 검사, 거짓 발표문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그대로 베껴 보도한 기자들,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법으로 정해진 합의절차도 없이 권인숙 씨에게 실형을 선고한 판사들, ‘문귀동이 여론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안쓰러워하며 재정신청을 기각한 판사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제 잇속과 안위를 위해 공권력의 가면 뒤에 숨어 선량한 사람들을 음해하고 왜곡과 조작을 일삼던 모리배들의 어이없는 압력에 분통을 터뜨리고 저항했던 판∙검사들이 있었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때 그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과의 말을 건네기는커녕 입도 열지 않습니다. 해방 직후 친일 부역자들이 테러와 린치로 과거 청산의 시도를 짓뭉갠 일이나, 전쟁과 독재 아래에서 저질러진 홀로코스트의 혐의자들이 과거사 해결의 노력을 집요하게 방해했던 일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 자신의 비행을 캐는 방송사 피디에게 ‘함부로 입을 뻥긋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뇌까리며 ‘사이드’로 경고까지 하는 검사의 행동도,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수는 없을 겁니다.



한 이태 전부터 바로 최근까지 이 땅에서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 평범한 시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수많은 변고들도, 그 뿌리가 궁극에는 부천서 사건과 같은 음울한 우리의 과거사에 잇닿아 있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글_여영학 변호사(법무법인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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