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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칼럼]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최근의 판결 – 박갑주 변호사

 


 1.  


     한국전쟁 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두 가지 상반된 판결이 내려졌다. 하나는 ‘울산 보도연맹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문경석달마을사건’이다.



     울산 보도연맹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적인 예비검속의 일환으로 경찰, 국군이 울산군연맹 국민보도연맹원들을 구금했다가 그 중 일부를 법적 근거나 절차 없이 살해한 사건이다. 1950년 8월 5일부터 26일까지 3주간 계속된 만행에서 국군은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로 연맹원들을 이송해 총살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들의 유해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두골만 825구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7년 11월 27일에 확정한 관련 희생자는 총 407명이었다.


 


     한편 문경석달마을사건은 육군 제2사단 예하의 2개 소대가 1949년 12월 23일 정오경 문경석달마을에 들어가 이유 없이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마을주민들을 마을 앞 논에서 무차별하게 사살한 일이다. 당시 마을 주변을 포위 및 경계하던 군인들은 마을로 돌아오던 청장년들과 초등학생들을 총살했고, 마을주민 127명 중 81명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등 총 86명이 사망했다. 그 중 70% 가량이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였다.


 


 


2.


     나는 위 2개의 사건 중 하나를 맡아 소송을 진행했는데, 전부터 한국전 이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배상 및 보상 문제는 입법을 통한 해결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에 걸친 진상규명, 명예회복, 적절한 배상 및 보상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번번이 실망스러웠다. 때문에 지친 유족들에게 소송을 하자고 설득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고, 고심 끝에 마지막으로 사법적 판단을 믿어보자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3. 


     소송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미 위 사건과 유사한 거창학살사건에서 대법원이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서울고법과 수원지법에서 보인 국가의 전향적인 태도를 보면서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교도관들의 가혹행위로 인한 재소자 사망사건의 경우,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제반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도록 규정한 헌법을 형해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국가의 소멸시효에 관한 주장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서울고등법원 2006. 9. 19. 선고 2005나112095 판결>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결정은 법률상 의결기구에 의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의결인 점 등을 고려하면 진상규명결정을 통해 피고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건 진상규명결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면서 그 의결과정에 관여한 위원들의 고뇌에 찬 결단을 뒤집는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에 해당하거나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08. 9. 11. 선고 2008가합2162 판결>


    


     그러나 내가 맡은 문경석달마을사건은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이 받아들여져 패소했고, 다른 변호사가 진행한 울산 보도연맹사건은 국가의 그것을 권리남용으로 배척해 유족들이 승소했다.


 


     문경석달마을사건에서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이면서 법원이 들었던 주요 논거는 1960년 4.19 이후 국회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과 유족 일부가 학살사건의 진상조사 및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입법이 진행되지 않아 입법부작위 헌법소원을 청구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4.19 직후 국회 차원의 조사는 학살의 진상을 밝힌 것도 아니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유족들이 인정할 수 없는 점은 진상규명 의무가 있는 국가가, 규명노력의 일환으로 유족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인 근거로 삼았다는 점이다. 만약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상규명을 하기 전에 유족이 소송을 제기했다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법원은 청구를 기각했을 것이다. 억울한 유족의 원망에 “그럼 그때 왜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느냐”며 책임을 전가하는 국가의 태도와 사법부의 판단은 과연 옳은 지 의문이다.


 


     민간인 학살사건의 본질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냐는 사실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국민을 불법적으로 학살하고 그것을 은폐한 상황에서, 과연 소멸시효 항변을 하는 게 정당하냐는 판단의 문제이다. 그 점에서 이번 법원의 판결은 부당하기 그지없다.


 


     문경석달마을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에서 다행인 점은,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도 마련해 놓았다는 점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기본법의 취지에 따라 국민 전체의 여론과 국가재정, 유사사건의 처리문제, 결정상의 권고사항 등을 참작해 관련 법령을 마련하는 등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4.


     위 사건처럼 민간인 학살 관련 소송을 준비하다 보니 한국전쟁 이후에도 학살에 대한 공포가 우리 생활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 하나가 ‘골로 갔다’는 표현이다. ‘골로 갔다’에서 ‘골’은 ‘널, 궤’의 옛말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골로 갔다’는 말은 ‘널(관) 속으로 들어갔다’, 즉 ‘시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울산 보도연맹사건에서 본 것처럼,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학살은 주로 산골짜기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은 ‘골로 갔다’는 말을 ‘죽으러 골짜기로 갔다’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공포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모든 인간을 동물로 전락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본능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행위자의 인간성을 말살한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해 존엄성을 내팽개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숭고한 전쟁은 없으며, 전쟁은 인류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피해야 할 악이다. 그 같은 점에서 최근 군사적 실험(물론 한쪽에서는 과학적 실험이라고 이야기하지는 하지만, 그 효과는 군사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을 통해 형성된 남북한 간의 긴장관계가 유감스럽고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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