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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고] 쌍용차 사태, 이것은 인권의 문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는 1994년부터 2년 간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의한 높이 8m 분리장벽 건설. 이후 이스라엘과 가자는 완전히 나뉘었다. 간간이 검색대를 통해 허가받은 이들만 통행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가자봉쇄는 생필품을 비롯한 무역금지 조치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로켓포 공격, 비행기 공습 등 물리력보다는 물자공급 제한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제압하려한 것이다. 의식주에서 어려움을 겪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생명을 건 사투를 벌였고, 국제사회로부터 강한 비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은 결국 금지조치를 풀었다. 역사적,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공통된 합의 덕분이었다.


 


  인권은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는다. 강대국과 약소국은 물론, 강자에서 약자까지 인간의 모든 관계에 적용된다. 그런데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 양태는 15년 전 이스라엘의 가자봉쇄와 매우 닮았다.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파업 노조원과 공권력의 대치상황이다. 당시 사측은 전기는 물론 가스, 물 등 모든 물자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용역과 경찰은 회사 출입을 통제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튼실했던 중견 자동차 회사의 직원들은 ‘죽은 자’와 ‘산 자’로 나뉘어 그렇게 운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파업으로 고립된 ‘죽은 자’는 최루액과 물대포를 맞으며 버텼다. 또 다시 죽음에 내몰릴 위기였다.


 


  생사의 문제 앞에서는 누구든 죽을 각오로 대응하게 마련이다. 5년 전 정부의 섣부른 판단이 부른 이번 쌍용차 사태는 이들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당연히 직원들은 ‘함께살자’며 저항했고, 지난한 협상에 노사 양측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원인제공자인 정부는 이번 사태를 오로지 노사 간의 문제로 간주하고, 제 3자의 입장에서 노조의 파업에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파국으로 치닫는 양측의 ‘치킨게임’에 정부는 한가로이 심판의 휘슬을 불고 있을 뿐이었다. 법과 원칙 준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심판에게 규칙위반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나 보다.


 


  심판의 눈에 불법폭력세력으로 규정된 이들은 진압 대상일 뿐이었다. 용산에 선보였던 컨테이너 박스와 경찰특공대가 다시금 등장했고 테이저건과 다목적 발사기가 사용됐다. 모두를 위해 존재해야 할 규칙이 오롯이 심판의 강경대응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정부의 법 해석에 따르면, 파업 노조원들은 테러범에 준하는 위험분자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법에 의해 배제대상이 돼버린 노동자들에게 인권이 부여될 여지는 없었다. 심지어 “파업 노동자들에게 물과 음식, 전기 등을 공급하라”는 인권위의 ‘긴급구제조치’ 권고안마저 힘을 잃었다.


 


  점거 하루 만에 6명의 사망자를 냈던 용산. 이에 반해 77일 간 지루하게 대치하다 마무리된 평택. 정부가 이번 사태에서 인내심을 내비친 건 노조원과 공권력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8개월 전의 ‘용산’을 보았기 때문이다. 각종 화학약품이 쌓인 도장공장만을 남겨둔 채 진압한 모습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차악(次惡)을 택한 것을 두고, 이를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공대를 이용한 초고속 진압이나 대치국면 속에서 아사를 유도하는 장기전이나, 우리사회 약자의 인권이 뒷전인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둘의 본질은 사실상 다르지 않다. 그렇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권의 문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우리 모두의 헌법적 합의 말이다.


                                                                                                           
                                                                                                     [사진출처_ 프레시안 최형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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