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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며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며…
케이(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

<끼리끼리> 활동을 해 오면서,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과 인연을 맺게 된 점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끼리끼리>는 창립된 지 벌써 십년이 훌쩍 넘은 단체임에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전문적인 법적 자문을 체계적으로 받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인권 운동 진영의 일각에서 레즈비언의 권리 운동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고 그와 더불어 우리와 구체적인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 <끼리끼리>의 활동은 사회적인 무관심과 냉대에 시달려 옴과 동시에 여성 운동 및 인권 운동의 의제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소외당해 왔습니다. 전사회적으로 만연해 있는 호모포비아가 그 원인이겠지요.
운동하는 이들에게도 우리의 문제는 아예 없는 것이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우리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그를 통해 대사회적인 발언들을 조직해내며, 나아가 법제도적 차원의 실질적인 변화를 모색함에 있어서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과 함께 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 우리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귀중한 계기를 잘 활용해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별로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의 주범이니 변태적인 성욕의 화신이니 하며 떠들었지만 사실 그러한 호모포비아의 화살이 꽂혀온 대상도 실질적으로 게이일 뿐이었습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자로서 욕을 먹어온 이들은 엄밀히 말해 게이들입니다. 레즈비언은 기본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모두들 ‘여자가 뭘’ 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여성의 다양한 욕구와 그 욕구의 분출을 인정하지 않는 통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곳이 우리 사회이므로 ‘레즈비언 관계가 아무리 존재한다 해도 그게 우정 이상이겠느냐’, ‘자기들끼리 뭘 어떻게 하겠느냐. 여자들간의 성적 관계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라는 식의 사고방식들 역시도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여러가지 사회적 지향들을 배제하고 정확히 ‘성적 지향’ 만을 매개로 레즈비언과 이성애자 여성을 가르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통념들이 레즈비언의 존재를 왜곡하고 비가시화 해왔던 것 역시도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레즈비언은 심지어, ‘(남성과 성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여성’ 으로까지 간주되어 왔을 지경이니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는 가부장제에 그 기반을 둔 순결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가 비틀린 채 맞물려 있지요.
이는 ‘더러운 다이크dyke(레즈비언을 지칭하는 서구의 용어 중 하나)’ 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무차별적인 물리적 폭력에 시달려온 서구의 레즈비언들과 한국의 레즈비언들이 처해있는 상황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한국의 게이들과 한국의 레즈비언들이 처해 있는 상황도 많이 다르지요. 어쨌든,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위험한 존재라기보다 쉽게 무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레즈비언의 존재는 차츰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지난 10년간의 레즈비언 권리 운동이 이루어 낸 성과일 터입니다. 레즈비언의 삶과 레즈비언이 받는 차별을 기술하고 발언하는 부단한 노력이 만들어 낸 가능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존재의 가시화가 우리를 더 위협하고 있기도 합니다. 가시화는 점점 더 되고 있음에도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인 체계는 여전히 제대로 갖춰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항상 불이익과 차별 그리고 폭력에 노출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더욱 공포스러운 일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하여, 아웃팅outing(성적소수자의 정체성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의사에 반하여 타인이 폭로하는 것)을 매개로 한 범죄들이 기! 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아웃팅 협박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레즈비언에 대한 연쇄 강간 및 집단 폭력 등이 바로 우리를 공포심에 떨게 만드는 상황들입니다. 가해자들은, 레즈비언이 성폭력 피해를 입는 데 대한 공포보다 아웃팅을 당하는 데 대한 공포를 더 심하게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여성 차별적인 사회 환경과 호모포비아 그리고 가해자의 파렴치함이 합작해서 빚어내고 있는 레즈비언에 대한 테러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건들을 접수받는 활동가들 역시 자신의 생존과 활동 자체에 위협을 받습니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우리들 자신 역시 레즈비언이기에 그렇습니다. 언제 어디서 칼맞고 쓰러져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그건 일상을 지배하는 공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차별적인 환경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기울일 것입니다. 뿌리 깊은 호모포비아를 결국에는 근절해 내기 위해 쉼없이 운동해 나갈 것입니다. 더욱 많은 운동 세력과 손잡고 우리의 문제를 힘있게 알려내기 위해 연대의 노력 또한 적극적으로 해 나갈 것입니다. 지켜봐 주세요. 힘을 실어 주십시오. 이렇게 보내는 글 한 편 한 편이 읽는 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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