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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절규한다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_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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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절규한다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정정훈 변호사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

1945년 스위스 법원과 2006년 한국 대법원

1945년 스위스 법원은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한 바 있다. “개인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 법은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있어 최선의 이익이 된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법률적 효과를 부여해야한다. 사회는 그 성전환자가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의 법률적인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무엇이 그들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6년 한국의 대법원은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결정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한다.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고 이러한 권리는 질서유지나 공공복리에 반하지 아니하는 한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한다. (……) 성염색체를 출발점으로 하는 성의 이분법과 불가변성의 기본 전제가 수정의 필요성을 맞게 되었다.”

1945년 스위스 법원의 판결과 2006년 대법원의 결정은 동일한 논리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성염색체에 근거한 성별 이분법과 불가변성의 기본 전제가 수정될 필요”는 2006년인 현재에 와서야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정체성 상실의 한을 홍길동은 율도국이라는 조선의 바깥에서 실현했다. 그 바깥이 가능했던 것은 홍길동이 소설적 공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성전환자들에게는 ‘법적 자아를 진정한 자신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 상실의 문제를 실현할 수 있는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를 향해 절규해온 ‘그들’ 성전환자들에게 대법원의 결정은 환영할만한 것이나 너무 늦게 온 대답이다. 지금 이곳에서 인간의 조건을 절규하는 그들에게 ‘말씀’의 이름으로 ‘천국의 나라’라는 ‘바깥’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1945년 스위스와 2006년 한국의 대비를 통해서 우리가 반성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차단하고, 외면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 특수한 ‘사회적 공모’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성별 변경이라는 중대한 결정에 사회적 대화가 부족했음을 지적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차이의 도전’은 대립이 아닌 대화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절규’하는 ‘우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희망의 증거이다. 대법원은 이제 그 여러 절규들 중 하나에 답했을 뿐이다.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 “말씀”으로 그 “절규”를 가리거나 대신할 수는 없다.

* 제목 “우리는 절규한다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는 영국의 정치학자 존 홀러웨이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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