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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하나] 억압받는 세계 민중들과의 연대_최재훈

ㅣ쉼표하나

억압받는 세계 민중들과의 연대

– 그들의 체스판에서 인간답게 사는 법

 

최재훈 (경계를 넘어)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하는 이야기지만, 몇 년 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라는 사람이 쓴 ‘거대한 체스판-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일종의 두려움과도 같은 감정은 한동안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카터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회의 의장까지 역임하고, ‘미국 외교의 아버지’ 라는 소리를 듣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여전히 현역 정책 입안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합니다.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세계패권 유지라는 절대 목표를 중심에 놓고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그 넓은 세계를 체스판 삼아 이리저리 말을 옮겨가며 두는 그의 훈수는 그 스케일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장의 대담성과 솔직함으로 인해 읽는 이로 하여금 저항감조차 느낄 틈을 주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그 책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몇 년 전과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앞에 있었다면 이렇게 쏘아 붙여 주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당신들 마음대로 될 줄 알아?” 하고 말이지요.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서구 자본주의 문명과 가치를 절대 선으로 규정하고, 그 나머지는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회유와 협박으로, 또 때로는 서로 갈라져 싸우고 증오하게 만듦으로써 지배해야 할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인종주의자들 입장에서 2007년 오늘의 체스판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판일 겁니다. 한반도에서, 베트남에서, 쿠바에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그렇게 많은 졸들을 마음대로 주물렀으면 지금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을 때가 됐을 법도 한데 판은 날이 갈수록 꼬여만 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졸이라고 생각했던 세계의 민중들이 졸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비단 부시 정부를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고 있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1959년 혁명 이후 50여 년 가까이 미국의 철저한 경제봉쇄로 그렇게 고통 받고, 마이애미의 반쿠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수천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도 인간애에 기초한 사회주의, 국제주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쿠바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미국의 배후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쫓겨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베네수엘라의, 아이티의 빈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에티오피아 군대의 총과 탱크, 전투기 앞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이름모를 소말리아의 민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장벽에 둘러싸여 이스라엘의 인종청소에 맞서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잠깐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저는 작년과 올해 외국에 머물면서 그 곳에서 만난 한국의 젊은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들었던 한결같은 말이 “외국에 나와 보니까 한국이 더 부강한 나라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요” 였습니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답니다. 이제는 이라크전 파병을 이해하겠답니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과 문화를 가진 이들의 역사와 현실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선진국이 되어야겠더랍니다.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며 저는 그만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역시 체스판의 졸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바탕에 깔린 관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졸들을 밀어내고 체스판을 주름잡는 말이 되겠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체스를 두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그 판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리저리 옮겨지는 체스판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너무 막연하고 비현실적으로 들린다구요? 네,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그건 불가능한 몽상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고 주입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나가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모임을 만들고 행동을 조직하는 것. 그곳이 출발점이겠지요. 그리고, 이 지구상에는 이미 그런 확신을 가지고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지난 일년 동안 제가 먼 이국땅에 살면서 얻은 가장 큰 확신이자 소득이었습니다.

* 최재훈님은 지난 1년간 캐나다 밴쿠버의 반전운동 단체 ‘전쟁과점령반대행동(Mobilization Against War and Occupation, MAWO)’에서 활동하다 8월말에 귀국하여, 지금은 서울의 ‘경계를 넘어(www.ifis.or.kr)’라는 반전국제연대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넘어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지에서 벌어지는 침략전쟁과 점령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 레바논,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마 등과 연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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