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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를 찍은 자리- 미류

[쉼표하나]

쉼표를 찍은 자리

미류_인권운동사랑방/ 에이즈인권연대 나누리

우리는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쉼표하나’라는 꼭지의 원고를 청탁받고 나니 문득 저 말이 생각났다. 작년, HIV/AIDS 감염인 인권증언 <말할 게 있 수다!>의 무대 뒤 플랭카드에 적혀 있던 말이다.

이 말을 건넨 것은 감염인단체 활동가 S였다. 감염인 7~8명과 함께 어떻게 증언대회를 만들어갈까 고민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던 중이었다.

예정된 날짜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을 즈음, S가 증언대회 소개를 이렇게 하면 좋겠다면서 말을 건넸고 나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기꺼이 찬성했다.

감염인단체를 꾸려오면서 쉽지 않은 증언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동료들을 모으고 설득했던 당시에 대한, 그의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모임은 준비에 참여하는 감염인들이 각자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적어와 함께 나누면서 진행되었다. 글을 쓰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끼던 이들도 두 세 번 모임을 하고 나니 손으로 곱게 써내린 종이를 들고 오기도 했다.

얼굴이 다르듯 각자의 경험도 달랐지만 여기저기서 만나고 흩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증언대회가 어떤 자리가 되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준비하던 사람들 중 증언에 나서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조금씩 생기고 내용도 얼추 추스려질 때쯤 언론에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가 주요한 논의안건이 되었다.

무대에 커튼을 치고 음성변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된 회의의 끝에서 감염인들은, 적어도 증언대회에 오는 사람들과는 직접 눈을 마주치겠노라는 어려운 결심을 했다. 그때 S가 건넨 말이 저 말이다.

그래, 우리는 여기까지 왔어. 준비를 시작한 내내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마음이 흔들렸던 나는 S의 말에 큰 힘을 얻었다. 아직은, 조금 부족해보일 지라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증언대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귀기울여준 덕분에 모두들 뿌듯하게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무대에 나서진 못했지만 객석에 앉아서 동료의 증언을 들었던 감염인들도 크게 감동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에서 에이즈가 알려지기 시작하고 25년이 지나도록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리가, 이제야, 잔잔하지만 강렬하게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으므로.

모두들 흐뭇한 마음으로 뒷풀이를 하러 갔다. 서로 애썼다고 격려도 해주고 평가도 나누면서 술잔을 돌리던 중 옆에 앉은 J에게 전화가 왔다. 먼저 집으로 간 Y의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J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Y가 계속 울기만 하고 말을 안 하네? 뉴스에서 우리 보고 계속 눈물이 난대.” 나는 Y가 으레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증언에 나선 이들에 대한 걱정과 자랑스러움이 뒤범벅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일주일쯤 지나 증언대회 평가모임이 있었다. 준비를 함께 했던 감염인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리였고 Y는 멀리서 굳이 시간을 내어 나와줬다. 평가에서 오간 내용들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녀들은 증언대회의 준비과정이나 당일 행사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런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면 좋겠는지, 함께 다른 무엇을 또 해보면 좋겠는지를 얘기했다. 이미 내일을 위한 계획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Y는 그날 흘렸던 눈물의 자초지정을 들려주었다.

“집에 들어가서 뉴스를 보는데,
세~상에, 9시 뉴스에 J가 나온 거야.
어머, J네? 헉, H도 나왔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입에서 나온 거야.
그랬더니, 엄마가 나더러 아는 사람이냐 물어서,
내가 화들짝 놀라,
아니, 내가 저 사람들을 어떻게 알어?,
그러구 방으로 후다닥 들어왔지.

그런데 끝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살인자, 그니까 우리가 살인자도 아닌데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 변조하고 저럴 수밖에 없나,
그런 생각이 들은 거지. 근데 정작 나는 또 아는 척 할 수도 없구. 그르니까 마음은 복잡하고,
혼자서 소주병 들고 잠들 때까지 울었다니까.”

정작 화들짝 놀란 것은 나였다. 나는, HIV/AIDS 감염인들이 방송에 나갈 때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것은 오히려 권리라고 생각했다. 사전 동의도 없이 얼굴을 방송에 내보내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순식간인 만큼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었다. 모자이크 처리되는 것이 안타깝기보다는 우리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얼굴이 영상에서 짓이겨져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화나고 억울한” 일이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혼자 취해서 내일로 가는 길을 보지 않고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던 것. 그리고 주제넘게도 ‘활동가는 아닌’ 감염인들 역시 그럴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활동가는 아닐’지도 모르나 이미 에이즈인권운동의 길을 걸어왔고 나보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의 존재가 바로 그 길이고 ‘활동가’인 나는 그 길을 쫓아가고 있었을 뿐, 쉼표를 찍은 자리에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 그/녀들이었다.

1년이 되어가는 지금, S는 얼굴을 보기 어렵다. 조금 오래 쉼표를 찍고 있나보다. 한국 에이즈인권운동의 뿌리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윤가브리엘은 건강 악화로 조금 쉬고 있다. 그리고 “살인자도 아닌데” 모자이크 뒤에서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HIV/AIDS 감염인의 인권현실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작년 한해 에이즈예방법의 개정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해왔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를 하기도 했지만 보건복지부나 국회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쉼표도 없이 걸어가는 HIV/AIDS 감염인들의 길에 무기한 쉼표를 붙여 인권을 침해하고 삶을 유예시키는 것은 바로 이 사회다. 땀 한방울 식힐 한줄기 소슬바람과 같은 쉼표를 그/녀들과 나누는 일, 맞잡는 손이 많아질수록 더욱 쉬어지지 않을까.

HIV/AIDS 감염인 인권활동가 윤가브리엘 후원회
http://blog.jinbo.net/Aspeople
후원계좌 국민은행 001502-04-153002 (예금주: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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