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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당사자인터뷰] 왜 내가 죄인이 돼야 합니까?





 

말쑥한 정장이 일어나 허리를 숙인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공대 출신이에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중앙지검 관내이자 서울 변호사 대부분이 몰린, 이른바 ‘법조타운’이다. 공학도는 이곳에 터 잡아 법전이며 온갖 서류를 뒤적이며 산다. “왜 12년 동안 소송을 하겠어요? 이게 직업도 아니고.” 법률 지식은커녕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조차 별로 없었지만 “참 답답하고, 억울하고, 그래서 소송 마약에 걸려” 여기까지 왔다. 소송 준비를 거듭하다 보니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듯 터득”하게 됐다. 지난 1996년 LG전자 근무 당시 납품 관련 비리를 본사 감사실에 고발하여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해고된 정국정 씨 이야기다.


 


# 전관예우라는 독버섯


 


지난 3월 24일, 대법원은 정 씨가 LG전자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 등 무효 확인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원고의 책임 있는 사유로 말미암아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이유였다. 그간 LG전자, 경영진,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정 씨가 모두 승소하였음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다. “파기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전관예우라는 우리 사회의 독버섯이 제 머리를 지나갔습니다.” 정 씨는, 지난 2004년 자신의 패소가 확정됐던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소송의 재판장이 이번 상고심에서 LG전자를 대리한 점을 지적한다. “윤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죠. 판결만 정확했다면야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사실관계부터 왜곡했으니까요.”


 


정 씨는 “대법원이 왜 이렇게 판단하는지 정말 눈물이 나올 지경”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녹음행위를 ‘신뢰관계 파괴’라며 문제 삼았지만, 정 씨의 입장은 다르다. “내가 녹음을 하다 상사들한테 들켜가지고 직장 동료 간에 상호 신뢰를 깨뜨린 사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상사가 ‘넌 밥벌레다’ ‘징계 대상자다’ 하면서 그렇게 고함을 지를 수가 없어요. 출근하면 매일같이 퇴직원 제출하라고 종용하고. 그러니까 그 내용을 녹음한 거죠.” 이 녹음 내용들이 회사 측의 부당한 대우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자료가 되어, 정 씨는 직장 왕따로 인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해고 무효를 다투면서는 녹음한 것이 잘못이란다. 내부고발 이후 인사고과가 좋지 않은 데 문제를 제기하며 구조조정 대상자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했던 것을 ‘승진 청탁’으로 본 것도 유감이다. “회사의 정당한 조치에 앙심을 품은 ‘트러블메이커’처럼 보는데 참 답답하더라고요.”


 


파기환송심 재판장은 사심심리는 안 하고 절차부분에 대해서만 보겠다고 했다. 정 씨는 “억장이 한 번 더 무너지더라.”면서도, 제대로 된 사실관계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이야기할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절차적인 하자 부분만을 다투더라도 불리하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지만, 잘못된 사실관계는 사실심리에서 바로잡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 우리 사회의 이중적 태도


 


– 당신의 친구가 명백한 과실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목격자는 당신뿐입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면 친구의 죄가 감경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친구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소위 ‘개인의 의리와 공익과의 딜레마’ 상황에서, 한국인 가운데 “사실대로 증언하겠다.”고 답한 사람은 26%에 불과했다. 미국 및 유럽인 90% 이상, 일본인 67%는 물론, 중국인 48%와도 확연히 다른 결과다. 친구의 잘못을 밝히는 것이 곧 ‘배신’인 사회. 이른바 ‘내 식구 감싸기’ 문화 탓에 내부고발자가 속한 조직 밖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내부고발과 내부고발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정 씨도 “내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부고발을 한다고 나선다면 말리고 싶다.”고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최근 <공익신고자보호법>을 제정되어 이달 말 시행을 앞뒀다. 내부고발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조직 내부의 건전한 비판을 보장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나 정 씨는, “법 제도보다는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지금까지는 법이 없어서 피해를 봤던 내부고발자들을 이제 제도적으로 보호하겠다는 말인가요? ‘비리 사실을 알았더라도 참다가 법이 시행되면 고발하라.’는 식이라면 오히려 이상하죠.”


 


물론 공익제보자라는 용어도 없고 공익의 개념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던 때에 비하면 형편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정 씨도 “처음에는 ‘고자질쟁이’였는데” 지금은 떳떳하고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적극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위로도 된다. 그러나 비리 사실을 폭로 ․ 고발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속한 조직 내의 부정부패, 비리, 불법, 비윤리 행위를 알면 머뭇거리는, 우리 사회의 ‘이중적 태도’가 여전히 아쉽다. 그래서 교육 프로그램 등을 중심으로 한 캠페인 활동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연간 교육 시수를 정해두고 기업 내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시민사회단체에서 나설 필요가 있다. 언론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일회성 보도로 끝내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한다. 아이들이 꾸준히 접하고 학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식은 법만 만든다고 개선되는 게 아니잖아요.”


 


정 씨는 공익신고자보호법이 공익의 범위를 너무 좁게 본 것도 문제라고 했다. 문언대로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및 공정한 경쟁을 침해하는 행위에 한하여 공익침해성을 인정할 경우,


정 씨처럼 부품 납품단가가 높게 책정된 점을 고발한 사례는 보호 받기 어렵다. “좀 우습더라고요. 왜 우리들(내부고발자)끼리도 이렇게 편을 가르는지…….” 그는 “앞으로 나와 같은 사례가 있다면, 사기업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을 통해서 어떻게든 포함시켜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공정사회다운 인력 활용의 필요성




그에게는 “둘 이상의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리고 제보하는 사람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면, 공익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나름의 지론이 있다. “부패 행위를 신고해서 이익금의 얼마를 받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례를 사익으로 봐야죠. 비리제보자에 대한 포상이야말로 ‘사익’을 내세우는 것 아닌가요?”


 


대기업 비리는 그 불이익이 곧장 주주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공익적 사안이다. 흔히 기업을 ‘공화국’에 비유하여 그 영향력을 인정한다. 그런데 국가 차원에선 ‘공정사회’를 강조하면서도 사기업의 비리 단속에는 미흡한 면이 많아 보인다.


 


지난 7월 7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LG전자 구본준 대표이사는 “정도경영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가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내 비리 척결을 위해 칼 뽑았다.”면서도 그 제보자를 어떻게 보호할 지는 전혀 언급한 바 없다. 정 씨 입장에서는 “아이러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 내가 LG전자 소속이었지 않느냐, 이거죠. 언론에 그렇게 나왔는데 제 일을 모르겠어요? 모른다면 알려주고 싶어요.” 그는 “내부고발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내부고발자의 처우를 구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느 조직에든 ‘감사’는 반드시 필요하고, 내부고발자는 그 일에 적임자다. “만약에 내가 LG전자 감사팀에 들어가 있다고 해보세요. 비리 하겠어요? 얼마나 효율이 좋겠어요?”(웃음)


 


정 씨는, “국가는 사기업이 내부고발자를 활용하도록 적극 개입하고, 그들의 삶의 질이 실질적으로 향상되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말한다. 내부고발자에게 어떠한 피해나 불이익이 발생할 경우 그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해야 함은 물론이다. 내부고발은 공익을 위한 행위이므로, 국가가 나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는 내부고발자를 활용하기는커녕 내부고발자를 활용하라는 요구마저 외면하고 있다. 부패방지위원회 설립 당시, 내부고발자 이지문 씨를 비상근으로라도 넣으려는 노력들이 있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부고발자의 삶은 대체로 곤궁하고 피폐하다. 그러나 내부고발을 해서 생활도 보장되고 좋은 일로 인정도 받는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에 그러한 인식이 자리 잡는다면, 내부고발자에 대한 국민 인식도 자연히 개선될 것이다. 내부고발자의 처우가 개선된 사례 하나가 법이나 제도 개선, 캠페인 활동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정 씨는 “행하지 않는다면 다 공염불”이라며 건전한 비판을 보장하겠다는 국가의 말이 단순한 선언으로 그칠 것을 우려했다.




# 왜곡 없는 판결을 위한 준비


 


정 씨가 내부고발을 한 것은 특별한 인식이나 사명감 때문이 아니다. 그는 “나는 회사의 녹을 먹는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고 했다. 회사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어느 누구보다 강했고, 조직 내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마땅히 개선해야 한다고 봤다. 공익 변호사의 도움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국가기관에서 근무한 것도 아니고 공무원 신분이 아니니 공익 사건이 되기 어려운 줄로만 알았다.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알아보거나 혼자 힘으로 소송을 준비하다가 지난 2007년에야 공감을 찾았다. “돈도 안 들고, 소송 면에서도 성실하게 잘 맡아주니 얼마나 고맙겠어요? 사명을 가지고 일하는 분들이죠.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느 방송 관계자가 취재차 정 씨의 집에 갔다가 “소송기록이 1톤 트럭 하나는 되겠다.”고 말했단다. 정 씨는 지금, “죽더라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 같은” 그 많은 기록을 하나하나 들춰가며 소송을 준비한다. 서류 더미를 뒤적이다 보면, 어느 세월에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렸는지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무언가 할 시기들을 다 놓쳤다. 한 때는 “내가 별종인가? 내가 잘못한 건가?” 싶기도 했고, “경찰 ․ 검찰 ․ 법원에 할 말을 남기고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정 씨에게, 이것은 “운명”이다. “사실이 아닌데” 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회사는 복직합의서에 따른 특별재심을 아예 하지 않았다. 재심을 함에 있어서도 13명의 징계위원 중 단 2명만 회합하고 나머지는 인터넷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데 그쳤다. 징계규칙으로도 당연히 무효다. 이를 강조하면 승소할 것으로 확신한다.


 


정 씨는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할 뿐 아니라 회사에 복직하여 자신의 손으로 신변을 정리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열린 자세로 경청하는 법원”의 “사실의 왜곡 없는” 판단이 절실한 이유다. 그가 “진짜 평범한 직장인”으로 현관을 나서게 될 어느 하루를, 바라고 기대한다.


 



 


 


글_김현경(13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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