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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당사자인터뷰] 대한민국이 탈북자를 환영하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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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없다.”라고 못 박아 버렸다. 불법구금시설에 감금되었다고도 볼 수 없고, 범죄에 대한 강제수사에 적용되는 형사소송법상의 규정들이 적용될 필요도 없으며, 원고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 남한에 가고 싶었다.



A씨가 남한행을 처음 시도한 것은 2005년이었다. 97년부터 약 8년 정도 중국 길림성에 사는 동안 ‘남한 스피커’를 통해 남한이 인권을 존중해주는 자유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남한을 동경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 땅을 밟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교회를 통해 뜻을 모아 남한을 가고자 했던 20여 명의 일행은 연변역에서 북경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중국 사복 공안 10여명에게 체포되었다. 


 


  # 맞았다. 수없이 맞았다.



중국 공안에게 이끌려 간 곳은 중국 변방대였다. 그곳에서는 무언가 임무를 받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자꾸만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손에 쇠꼬챙이를 끼운 채 구둣발로 짓밟혔다. 한 달 남짓 조사를 받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제멋대로 휘어진 채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북한에서는 북한보위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코가 삐뚤어지고, 머리가 함몰되도록 맞았다. 코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제조조차 거치지 않은 검은 마약을 가져다주었다. 코뼈가 부러져 휘어지고 머리가 다 부서졌는데도 통증을 느낄 수 없었고 점차 마약에 중독되어 갔다. 중독 증세가 심해지고, 순간순간 기억조차 잃어버리는 지경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출소할 수 있었다.


 


  # 그래도, 남한에 가고 싶었다.



북한 보위부에서 한참을 맞고 나니 “정말 이곳은 살 곳이 못 되는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남한 사람들 누구나 누린다는 그 자유가 그에게도 절실했고, 지긋지긋한 가난도 벗어나고 싶었다. 중국에 체류하면서 한푼 두푼 모아 가족에게 보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언제라도 다시금 중국 변방대에 끌려갈 수 있다는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결국, 가야 할 곳은 남한뿐이었다.



고향 동생과 함께 두만강을 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불길했지만, “야, 그냥 가자”고 말하며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가능한 한 깊이 잠수해서 강을 건너야 했다. 그렇게 고향 동생을 두만강에 남겨두고 중국 땅을 밟았다. 자꾸만 아찔한 그 총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중국에서 지인을 통해 브로커를 만날 수 있었다. 브로커(보통 중국내 브로커는 남한사람이다)는 한국 돈 250만 원을 요구했다. 어차피 한국에 도착하면 정착금 600만 원을 받을 수 있으니 큰 부담은 아니라고 설득했다. A씨는 미심쩍어 250만원이면 며칠 벌면 모을 수 있는 돈이냐고 물었고, 브로커는 두 달 벌면 만들 수 있는 돈이라고 말했다. “그럼 가자!” A씨는 확신에 차 있었다. 연변에서 북경, 베트남, 베트남 내 덴마크 대사관, 다시 베트남 내 한국대사관, 싱가포르를 거쳐 드디어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남한이 진짜 발전을 많이 했구나. 남한 사람들이 정말 많은 일들을 했구나. 정말 고생 많았겠구나.’ 하며 연신 감탄이 터져 나왔고, 괜한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 대성공사 Side A – A씨가 ‘기억하는’ 그곳의 진실



남한에 대한 감상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누군가 “야, 여기 OOO이 누구야”하고 A씨를 찾았다. “네, 접니다” “너 **야! 너 여쪽가서 서”. 지금껏 인권침해를 많이 받아왔던 삶이었던지라 이 정도는 인권침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이니까 그러겠지.’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인솔자를 따라 자동차 뒷자리에 앉았다. 앞에서 버튼을 누르니 기계가 나와서 다리를 빼지 못하도록 감싸버린다. 그 꼴로 대성공사까지 이송되었다. 대성공사란 대한민국이 대부분의 탈북자를 맞이하는 만남의 장소이다. 그곳에서는 국가정보원 주도의 합동신문이 이루어진다. 최장 180일 동안 북한 이탈 주민이 맞는지, 간첩은 아닌지, 정착금을 노리고 위장 입국한 중국동포는 아닌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A씨가 기억하는 그곳은 폭언, 폭행, 감금, 환자방치의 공간이다.
걸핏하면 A씨는 ‘또라이 같은 개**’, ‘거지**’, ‘노숙자보다 못한 **’라고 불려야 했다. “아저씨, 저 여기 맞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합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저도 사람이에요. 권력은 없어도 권리는 있는 거잖아요.”라고 A씨는 울부짖었다. 그러자 조사관은 “또라이 같은 **야! 분위기 파악해라!”라고 소리치고 음료수 캔으로 때리고, 볼펜으로 머리를 내려찍으면서 온몸으로 그곳의 분위기를 알려주었다.



A씨는 대성공사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극심한 복통에 시달렸다. 배가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군의관에게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저 사람 맹장염에 걸린 것 같아요. 나도 앓아봐서 아는데 저거 맹장염이에요.”라고 말하였지만, 군의관은 문을 ‘요만큼’ 열고 가루약을 던져 줄 뿐 흔해빠진 청진기 하나 몸에 대어 보지 않았다. 그렇게 4~5일이 흘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근처 병원으로 A씨를 옮겼다. 그러나 맹장이 이미 터져버려 작은 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의사는 A씨의 희미한 의식 속에서 “완전 떡이 져버렸네”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야만 했고, 구급차를 타고 이송되던 도중에 A씨는 의식을 잃었다.


 


조사관의 뜻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겁한 술수를 썼다. 조사관은 “이 ** 내일 아침에 갈 **니까 가방 싸서 복도에 내놔”라고 경찰에게 말했고, 경찰들은 순식간에 A씨의 짐을 싸고 있었다. A씨는 ‘이대로 죽는구나. 북에 돌아가면 나는 죽는 건데,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며 탄식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면도기를 부숴 면도칼을 분리해 내 죽으려던 시도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던 시도도 끝내 발각되어 뜻대로 되지 못했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있는 구조라는 것. 밖에서 열어주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 조사를 다 받기 전에는 TV를 볼 수도 운동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 맹장이 터진 지도 모르고 함부로 먹었던 소화제 탓에 신장에 후유증이 와서 아직도 요실금으로 고생 중이시라는 것. 대성공사와 하나원을 거쳐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맞이한 첫 날, 브로커가 찾아와 환율이 올랐으니 250만 원이 아닌 350만원을 받아야겠다며 새벽 2시까지 여섯 명이 행패를 부렸다는 것. 그런데 당시 A씨의 소재지를 아는 곳은 대성공사와 하나원뿐이었다는 것. 요약하여 ‘서술’만 하기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처참하기만 한 이 모든 것들이 A씨가 ‘기억하는’ 대성공사에서의 진실이다.


 


  # 대성공사 Side B – 국정원이 ‘단언하는’ 그곳의 진실.



A씨는 내연녀 관계로 함께 입국한 B씨(여)가 중국인임에도 마치 북한 주민인 것처럼 위장 입국시키기 위하여 북한의 명절, 노래, 조직생활 등 북한 실정에 대해 사전학습을 시키는 등 치밀한 준비를 통해 지원한 사실이 발각되어 정착금 50%가 삭감되었을 뿐 조사과정에서의 폭행 등 가혹행위는 일절 없었다. 관련법에 따르면 이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천만 원 이하 벌금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이지만 탈북자임을 고려하여 정착금 삭감조치만 부과한 것이다.



군의관이 4일분의 소화제와 진통제를 처방, 투여하였는데도 재차 복통을 호소, 인근 병원에서 맹장염 수술을 하려고 하였으나, A씨의 재북 시 폐결핵 병력을 감안하여 호흡기 관련 전문의가 있는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 맹장염 수술을 받게 하는 등 최선을 다해 관련 조치를 이행하였다.



대성공사는 탈북자들이 국내 입국 이후 처음 맞게 되는 대한민국 시설로서 이곳에서의 경험이 대한민국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그 어떤 정부시설보다 최첨단으로 건축하되 탈북자들에게 너무 위압적이지 않도록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배려하여 만들어진 곳이며, 이곳에서는 탈북자들이 국내에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국정원이 ‘단언하는’ 그곳의 진실이다.


 


# 둘 중 하나는 거짓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국정원이 지적한 B씨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A씨는 이렇게 해명한다. 연변에서 베트남까지 가려면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하다. 중국 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하여 탈북자를 인도하면서 받는 사례금이 약 5만 원이라고 한다. B씨는 바로 그런 가이드였다고 주장한다. A씨의 내연녀는 따로 있었고, 그 분 역시 중국 사람이다. 지금은 그 분과 정식으로 혼인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 남한으로 옮겨와 동거중이다. 중국인인 내연녀와 남한에서 함께 살기 위한 안전하고도 합법적인 방법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 면 국정원의 주장대로 B씨를 데려오기 위해 자칫 잘못하면 5년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무리한 방법을 A씨가 썼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결국, A씨는 정착금 50%가 삭감되었다. 대성공사 조사 과정에서 허위진술을 하고, 진술거부를 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흔히들 법을 아는 사람들은 ‘수익적 처분’이란 보다 쉽게 취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아니, 단 한 순간이라도 A씨가 되어 생각해 보자. 아무런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혈혈단신 목숨을 걸고 무모하게 내려와버린 A씨에게 정착금 600만 원이 과연 ‘수익적 처분’일까? 조사결과가 북한 이탈 주민이 맞는 것으로 확정되고 대한민국의 국적까지 부여해 준 상황에서 그 돈 300만 원을 꼭 깎아야만 했을까? 버스를 타면 돈을 내야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사람이다. 그야말로 ‘생존의 기반’, 아니 어찌보면 ‘생존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그 돈을 깎아야 할 만큼 우리는 지금 가난한가?


 


 


동일계 내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도 없고 어쩌면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진실을 믿을 수 있겠느냐’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되어버린 판국에 ‘국정원이 단언하는 그곳의 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A씨와 유사한 경험을 겪었다고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유야 어찌됐든, 막강한 공권력을 휘두르는 그들을 더 이상 이대로 믿고만 있을 수는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대성공사의 ‘훌륭함’을 믿어보면 어떨까?



실제로 대성공사는 위와 같은 조사를 통해 황장엽 암살단을 체포해 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폭행 등의 가혹행위는 일절 없었다고 한다. 드디어 절충의 지점이 보인다. 어차피 대성공사는 단 한 대도 때리지 않고, 단 한 번의 욕설도 섞지 않으며, ‘암살단’을 체포해 내는 ‘출중한 능력’을 지닌 곳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기며 ‘도저히 믿지 못할 조직’이라는 푸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이러한 문제는 대성공사의 훌륭한 현실을, 규범이 따라가지 못해 생긴 불필요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이제라도 대성공사의 훌륭함을 제도가 뒤따라 가 주기를 나는 제안한다. 이미 국정원이 이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제도화하자. 지금 시민사회와 탈북자들이 한 목소리로 요구하는 것들은 정확히 바로 그것이다.


 


 “간첩 임무를 받고 왔을 수 있죠. 그래도 그런 사람들도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것이 이 나라 법 아니에요? 당시에는 물론 국적은 없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을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저희한테 변호사를 선임시켜줘야 하는 거에요. 국정원에서도 OOO이 너한테 붙은 변호사는 누구다. 이렇게 얘기해주고, 조사관 선생님에게 조사를 받듯이 변호사님도 저에게 묻는 거에요. OOO씨 오늘 당신에 대한 인권침해는 없었습니까? 그러면 전 그날 있었던 일을 조사관 선생님에게도 이야기하지만 변호사님에게도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런 제도가 있어야 하는 거에요. 이 나라가. 그래야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외칠 수 있는 거에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 그리고… 아직 못다 한 이야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 땅에 서기 위해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또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피해를 당할 가능성,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변을 당할 가능성, 남한사회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한 무시,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당신은 이만한 위험들을 감수하면서 이 땅을 간절히 원해본 적이 있는가?


 


대한민국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렇게 온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A씨는 ‘최저임금제’가 있다는 사실을 입국 후 2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침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하고도 매달 92만 원을 받았고, 그마저도 월급통장은 사장님께 맡겨 놓아야 했다. 최저임금이 4,500원이면, 적어도 4천 원은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A씨의 물음에 허탈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야 너는 말귀도 못 알아 먹으면서 뭔 일을 했다고 해’라고 사장님이 화내시면, 사실 저희가 또 할 말이 없잖아요. 밥통이 밥통이 아니라 벤또라는 것도 모르고 일하는데, 4,500원을 다 받을 수는 없고, 여기서는 외래어가 많으니까. 기본적인 말들도 나는 잘 모르니까….”


 


불합리한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다 보면, 마치 마땅히 그러한 차별을 겪어야만 하는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인 것 마냥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누가 그들을 잔뜩 웅크리게 했는가? 국정원과의 진실공방은 뚫리지 않는 철옹성을 뚫는 것 마냥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제멋대로 빨간색을 덧칠해 버리기 전에, 우리를 힘들게 찾아온 ‘사람’으로 대하는 일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다. 대한민국과의 첫 만남의 순간은 비록 ‘정말 거짓 같은 기억’일지라도 새롭게 맺게 되는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변화들을 분명 만들어 낼 수 있다. 국정원의 전향적인 태도를 기다리는 일 말고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존재한다.


 


충청남도에서 서울까지 1심 판결 선고를 들으러 갔다. 단 3분 만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래, 다른 사건들도 보통 3분이면 끝난다고들 한다. 그러나 ‘원고의 이 사건 청구는 이유없다’라고 같은 결론을 말하면서도, 사람은 다른 것들도 함께 말할 수 있다. 말하는 언어의 의미는 그러하더라도 말하는 어조, 그 순간의 눈빛, 곁들여진 표정, 사람은 그런 것들로 다른 것들을 함께 말할 수 있다.


 


세상은 그러한 것들을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말한다. 


 


                                                   글_ 황호경 (15기 인턴)


취재_ 김구열, 김홍율, 정명화, 황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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