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서평『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존의 시각 가운데 특히 경계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족의 명예와 관련해 바라보는 시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것이 마치 과거 어느 시점에만 있었던 비극인 것처럼 역사 속 화석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첫 번째 시각은 여성의 몸을 ‘순결’과 ‘타락’의 이분법을 가지고 해부하는 가부장제의 정치학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 시각은 여전히 우리 사이에 지속되는 폭력에서 우리의 두 눈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연선의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는 ‘위안부’ 문제에 피해심리나 민족의 자존심을 중심 삼은 시각으로 접근하는 대신 남성성과 여성성, 민족 정체성이 한국 민족주의와 일본 민족주의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 살핀다. 저자는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시각에서 나타나는 성과 민족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국가 차원, 그리고 성별(gender)과 성(sexuality) 차원에서 나타난 식민주의 권력이라는 맥락에서 위안부 제도를 좀더 포괄적이고 명료한 지도에 그리기 위해 위안부 여성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 둘 다의 경험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살펴”(76쪽) 보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시선의 모순과 한계

‘위안부’ 여성들의 피해를 국가의 상처와 수치심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은 여성의 몸을 국가의 재산으로 보고 또한 여성성을 ‘정숙함’과 ‘더러움’ 두 가지로 규정하는 이분법을 펼친다. 여성의 몸을 한 국가, 나아가 지배계급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하여 그 여성의 몸이 다른 국가에 의해 침해당했을 땐 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이 침탈당한 것으로 보는 것은 여자의 몸을 자리 지우는 권한이 여자 자신이 아닌 국가 권력과 위계질서 상단의 가부장에게 주어져 있을 때, 즉 가부장적인 순결 이데올로기를 통해 드러난다. 성애를 중심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폭력에 대한 사회 전체 차원에서의 반성 없이 도리어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상대편을 공격하는 일은 기존의 폭력을 심화시키고 재생산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편리하게 회피하도록 돕는다.

성 지향적 관점의 한계 – 이젠 더 포괄적인 그림을 향해

다른 한 편 여성주의 내의 성 지향적 관점 역시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서 저자의 통찰력이 발휘된다. 성 지향적 관점은 “민족 · 인종이나 다른 차이에 따라 나타나는 남성 지배 형태의 다양성,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여성의 일상적인 삶에 가져오는 함의 등을 중요한 분석의 이슈로 보지 않”음으로써 “결국 식민주의적인 관계를 재강화할 위험이 있”(66쪽)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위안부 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본 식민주의와 일본 천황제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한계로 들어 저자는 위안부 문제에서 드러나는 성폭력의 문제의 인종 · 민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그녀는 “근대 일본 내 성 정치학이 식민주의 권력의 표현으로서 식민주의의 팽창을 위한 성(sexuality), 특히 여성의 성(sexuality)의 사용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여성주의 운동 지향적인 관점’에 동의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결 이데올로기, 그리고 남성의 성욕이 통제 불가능한 것이라는 가부장적 신화라는 두 변수가 권력 관계를 재생산해내는 방식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통제 불가능한 남성 성욕’이라는 신화

남성의 성욕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매매춘 시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여러 사실적, 논리적 모순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 신화에 대한 신앙 자체가 군사주의 내에서 군대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불가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인들에 의한 빈번한 강간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상해에 위안소를 설치한 것”이라는 일본 측의 설명에 대한 아무런 의심 없이 던지는 비판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나날에 동일한 꼴로 되풀이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본능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남성의 성이라는 신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순환적으로 남성에게 성적인 지배자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주의 형태의 남성성에 대한 신화와 실천은 서로를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담론적인 실천’(discursive practices)을 이루게 된다.”(182쪽) 그렇다면 이 ‘담론적인 실천’은 어떤 전략을 통해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였는가?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의 전략

군인들은 위안소를 찾는 이유들 중 통제되지 않는 성욕을 들기도 했으나, 그 가운데 특히 눈여겨볼만한 이유는 이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남자가 되어보지도 못 하고’ 죽을 순 없다는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한국에서 군대에 가기 전 ‘동정’을 면하게 해주겠다며 사창가로 친구나 후배들을 데려가는 남성들 사이의 연대를 연상시킨다. “이는 남성성이 성경험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성(sexuality)은 남성성의 정수라는 가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즉 성은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수단인 것처럼 여겨진다”(136쪽)고 저자는 보았다. 일본 군인들은 “군대가 나를 남자로 만들었다”는 믿음을 갖기도 했다.

저자는 “위안소 제도가 일본 군인들의 군사적 남성성과, 한국인 위안부들의 ‘노예화되고 성적 대상화된 여성성’과 민족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160) 하고 물음으로써 논의를 시작한다. 일본 군대는 군사들을 재사회화시킴으로써 그들에게 공격성과 동시에 충성심을, 즉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체화시켜야 했다. 일본군은 이 두 측면 모두에 있어 군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위안소 제도에 의존했다. 위안소 제도를 통해 구현된 위계질서와 성차별구조와 폭력은 일본 군사들 내에 군사적인 남성성을 재강화 시키는 목적에 부합했고, 또한 군사들이 충성과 복종의 차원에서 유아화 되었을 때 그들은 ‘위안부’ 여성들에게 부여된 ‘모성’에 의존할 수 있었으며 여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성욕을 방출함으로써 다시 지배적인 남성의 위치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위안소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남성적인 권력을 다시 만회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185쪽)하였다. 위안소 제도는 “공격성과 잔인성의 경감과 강화라는 두 가지 전적으로 반대되는 기능을 동시에 하도록 고안”(188쪽)되어, 군대라는 조직사회 내의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패러독스를 해소시키는 완충제로 일본 식민주의 내에서 기능한 것이다. 군대 위계구조의 제일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일반 사병이었지만 그 아래, 특히 체벌의 위계구조 맨 밑바닥에는 더 낮은, 유일한 ‘부하’들인 ‘위안부’ 여성들이 존재함으로써 군대 내에서 생겨날 수 있는 불만과 탈주를 막는데 유효한 장치로 작동했다. 위안소 내에서 ‘억압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성본능’이라는 신화와 가족 이데올로기

‘성녀-창녀’의 이분법은 남성의 ‘통제 불가능한 성욕’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신화와 ‘모성’을 가진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라는 신화를 포함한다. 일본 식민지 시대의 일본 군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위안부’ 여성들은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상과 모성적인 여성성을 함께 부여받았다. 여성의 몸을 성애화하고 ‘모성’과 재생산의 역할을 부여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발걸음을 같이 하는 것이 군대 내외의 위계서열 짓기를 위한 가족 이데올로기이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일본사회를 조직하는 원리였을 뿐 아니라, 일본 군대 내 위계질서 또한 부모자식관계를 모델로 삼았다. 위계질서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는 군인들에게 국가를 위한 봉사와 상부에 대한 복종과 충성, 희생의 태도를 체화시켰으며, 상사의 규율에는 엄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위안소 역시 가족주의의 위계적 관계가 유지된 또 하나의 장으로서, 위안부들이 당한 폭력과 억압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합리화되기도 했다.

오늘도 지속되는 폭력 – 목소리의 ‘재발견’을 향해

가족적 위계질서와 혈연 중심의 가족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온갖 인권 문제의 바닥을 관통하고 있다. 연장선상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이 입은 폭력을 과거 한 때 벌어진 비극으로 치부하는 태도의 문제점은 이것이 역사 속 화석이 아닌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여성을 성애화하고 모성과 재생산을 위한 몸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의 군대와 식민지주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였다. 오늘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애화는 지속되고 있으며 ‘성노예’와 ‘군사 만들기’는 여전히 군사주의적 위계서열 구조가 팽배한 한국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밑천이다.

‘위안부’ 생존자들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침묵했는가? 이는 그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갖지 못 했기 때문이다. 아내 폭력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이 무력감과 수치심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폭력을 입은 여성이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긴 거의 불가능하며, 도리어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낸 뒤로도 고향에 돌아와 ‘화냥녀’ 취급을 받아야 했던 ‘위안부’ 여성들 중 일부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그 뒤로도 ‘순결’과 ‘재생산 능력’을 잃었다는 이유로 사회와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에게서까지 외면당해야 했다. 이것이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한 이유가 아닌가. “기억은 단지 뇌세포 작용에 의한 생물학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사회적인 현상이다.”(63쪽) 그들이 드디어 자기 목소리를 찾을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타자화된 이들에게 목소리를 쥐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목소리’에 통로를 여는 일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과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고민과 반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