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뺏벌’에 서서 ‘1993년’을 기억하다

매주 수요일, 나는 ‘북의정부’행 국철을 타고 의정부역까지 가서, 다시 1번 시내버스를 타고 ‘뺏벌’에 간다.

‘뺏벌’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으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스탠리 부대(Camp Stanley) 주변의 기지촌 매매춘 집결지를 말한다.
이제는 의정부 시내버스를 타면 정거장 이름으로 안내방송이 나오는 공식화된 지명이 되었다.
이곳 ‘뺏벌’에는 지난 20년간 기지촌 여성의 피해를 지원하고 인권보호 활동을 펼쳐온 ‘두레방(My Sister’s Place)’이 있다.

‘1993년’은 내가 기활(기지촌 활동)을 위해 처음으로 두레방을 찾았던 때이다.
그해 여름은 내가 활동했던 동아리에서 대동제때 *‘윤금이 살해사건’을 마당극으로 각색하여 공연을 올렸던 때이기도 하다. 기활을 가서 두레방 빵을 만들었고, 기지촌 여성의 자녀(혼혈 아동)를 위한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그림 그리고 숙제하며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10여년이 지나 다시 뺏벌로 돌아왔다.
지역적인 장소, ‘뺏벌’이라는 지명, 두레방은 그대로였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뀌어 있었다.
‘양공주’라고 폄하되었던 한국 여성들은 더 이상 없었고, 가난한 나라(필리핀 등 동남아와 러시아 등지)에서 이주해 온 외국인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두레방에서 지원하는 내용도 달라져 있었다.

이주 여성과 미군과의 결혼·이혼·양육권(이 부분은 국제 사법의 문제로 관할과 준거법이 쉽지 않다),
체류 문제, 기획사의 횡포(중간에서 임금 가로채기, 비자 압수하기, 도망자 신고하여 불법체류자로 만들기), 국경을 뛰어넘는 인신매매 문제 등이 지금 뺏벌이 당면한 현안들이다.

바뀌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양공주든, 이주 여성이든 모두 ‘가난한’ 여성이라는 사실, 지난 10여년간 뺏벌에는 미군 기지가 그대로 있었고, 미군 기지 옆에는 기지촌이 그대로 있었고, 기지촌에는 여전히 가난한 여성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두레방에 지원 나간지 어언 3개월이 되어간다.
뺏벌이 당면하고 있는 법률적 사안의 해결 조짐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여자에, 외국인에, 가난하고, 성매매에, 미군 문제에, 뺏벌의 여성들이 처한 조건 어느 것 하나도 간단치가 않다.

*윤금이 살해사건 : 1992년 10월 28일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씨는 미군 마클 케네스 리 이병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사인은 ‘전두부 열창에 의한 실혈’로 밝혀졌다.
당시 이 사건은 끔찍한 살해 방법과 사체 훼손으로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직장 안으로 27cm 들어간 우산, 자궁 속의 맥주병 2개, 질 밖에 밖힌 콜라병 1개 등이 사체에서 발견되었고, 사체 위에는 스파크가 뿌려져 있었다. 자궁속의 맥주병에서 발견된 케네스 이병의 지문이 범인 검거에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후 18개월 동안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살해미군 구속 처벌과 공정한 재판권 행사’를 위해 서명운동, 집회, 재판 참정 등이 잔행되었다. 그 결과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케네스 이병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케네스 이병은 천안 소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기지촌 여성의 인권 실태의 열악함을 전 국민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