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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병역거부 운동의 공감 지향 – 나동혁

[공감칼럼]

병역거부 운동은 공감을 지향한다

 나동혁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처음 학생운동을 시작할 때 내게 운동은 분노였다. 감정은 격하게 표출되었고 때로는 파괴적이었다. 파괴와 건설의 새 세상으로 가자는 슬로건만큼 마음을 들뜨게 하는 구호도 없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지 않던가! 파괴 없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자신을 점점 더 강하게, 동시에 외롭게 만들었다.
병역거부를 결심할 때쯤 내게 운동은 전략과 전술이었다. 조직적 전망이 없는 운동은 무기력하고 허망해 보였다. 나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다. 그러나 갈수록 외로워졌다. 결국 골방을 선택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거침없이, 배신감과 냉소가 마음을 지배했다.

공감(共感)-감정을 함께 나누는 일.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은 어렵지만 행복한 일이다. 살면서 진심으로 공감 받고 있다는 느낌, 공감 해주고 있다는 느낌 정말 소중하다. 타인으로부터 공감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은 밝고 평화롭게 산다.

병역거부 운동, 평화운동은 공감을 지향한다. 시스템이나 제도의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진정으로 함께 아파할 수 있다면 이미 길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감은 기적을 만든다. 누군가 당신에게 기적이 되었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그 사람에게 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방부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도 사회복무를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발표를 요약하면 현역병의 2배 기간을 소록도나 결핵병원 등에서 사회복무로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이나 논쟁을 피하기 위해 복무 기간을 지나치게 길게 설정했다는 점을 포함해서 부족한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 때문에 총을 들 수 없다는 사람에게도 감옥 대신 새로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날이 곧 온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이 문제로 전과자가 된 사람은 1만 3천명을 넘는다. 현재도 9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감옥에 있다. 이들이 수감되었던 기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까?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엄청난 숫자가 나올 것이다. 인권 선진국을 지향하고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에서 이런 현실을 마냥 외면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가장 보수적인 국방부에서조차 사회복무제도를 받아들인 것은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 때문이다. 그만큼 이제 한국 사회도 국제적 위치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은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풍부하게 갖춰진 나라다. 어릴 때부터 단일민족의 신화를 교육받는다. 유교문화 영향으로 혈통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 침략과 수탈로 점철된 근대사는 방어적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방어를 이유로 끊임없이 힘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고 힘의 부족이 불러오는 갈증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일본, 중국이 역사왜곡을 일삼고 미국, 러시아까지 가세해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 힘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간절해진다.

이때 힘을 키우는 주체는 ‘국가’다. 여기서 국가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한다. 힘을 키우려면 국가를 우선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라나고, 개인의 안위는 뒷전으로 물러난다. 독재정권은 이를 잘 이용했다. 경제와 군사 분야의 무한성장. 오늘날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이 두 가지 갈망에서 비롯된다. 국가주의는 가장 강력한 집단주의의 일종이다. 국가라는 주체가 집단주의에 빠지면 그 위험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여전히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양날개다. 모두 힘을 키우지 못해 안달이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강대국에 끼어 있는 처지에 아무리 성장해도 이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열등감은 끊임없이 강력한 힘을 갈망한다. 박찬호가 잘 나갈 때 대한민국 남성은 죄다 메이저리그 광팬이었다. 이승엽이 잘 나가니까 메이저리그는 한 물 가고 일본 프로야구가 절정이다. 비인기 종목 핸드볼의 선전은 올림픽 때나 되어야 전국민적 사건이 되고 수영선수 박태환은 떠도 수영의 인기는 뜨지 않는다.

황우석에 대한 광적인 지지도, 욘사마의 인기도, 전도연의 국제영화제 수상이나 ‘디워’의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열광도 모두 이등 콤플렉스의 반영이며 대리만족의 충족이다. 이승엽이 시들면 일본야구 인기도 시들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에 K-1은 한국시장을 개척할 목적으로 최홍만을 키운 것이다. 심형래에게는 학력위조 파문도 피해간다. 반면 절정을 누리던 가수 유승준은 어떤가? 한국인들의 나라사랑은 유별나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잊게 만든다. 그저 돈이 된다면!
대선을 앞두고 ‘경제’라는 프레임을 이명박이 선점했는데 이에 대한 대항마로 각광을 받는 문국현이 ‘사람중심 진짜경제’를 내세워 뜨고 있다. 진보를 자처하는 대선주자가 경제를 내세워 뜨고 있는 현상은 낯설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진보=민주주의/분배 중심, 보수=경제/성장 중심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누구도 경제성장이라는 프레임을 외면하고는 국민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사람들은 성장에 목말라 하고 있다. 힘에 대한 목마름이 군사력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이미 국익이란 명분이 파병을 정당화시켰다. 그 다음을 한 걸음을 떼는 일도 어렵지 않다. 토양은 충분하다. 사람들은 목말라 있다.

해방 이후 50년이 지나도록 병역거부 문제가 가시화되지 않은 것은 이런 배경 탓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장애물을 가차 없이 제거한다. 때에 따라서는 집단의 단결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장애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치즘이 유대인을 원했고 독재정권이 빨갱이를 원했듯이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경제와 군사의 무한성장을 위태롭게 만드는 이들은 모두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애초에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이 그랬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그랬다.
지금은 세상이 변해 빨갱이들의 이야기가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왔지만 병역거부자는 여전히 국가주의의 희생물로 남아 있다. 이제 그 긴 어둠의 시간이 끝나는 것일까?
한국사회는 국제사회에서 평화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남북의 평화를 이야기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인권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자연스레 병역거부자에 대한 시선도 온화해질 것이라 믿는다. 나아가 경제력과 군사력에 대한 갈망이 인권, 민주주의,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되길 바란다. 공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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