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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아저씨 사이 ; 경험, 신뢰, 그리고 입장의 동일함_하승수 제주대 교수

공감칼럼

변호사와 아저씨 사이 ; 경험, 신뢰, 그리고 입장의 동일함

하승수_제주대 교수

  우리 동네에는 나를 “하승수 씨”라고 부르는 여성이 있다. 물론 우리 동네에서 이래저래 같이 부대끼고 활동해 온 여성 중에도 나를 “하변호사님” 또는 “하변호사”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서울에 있는 시민단체 활동가들 중에는 줄여서 그냥 “하변”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엮인 엄마들은 그냥 “누리 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사회는 호칭에 민감한 사회이다. “○○○변호사님”이라는 호칭에는 신뢰나 존경심보다는 상당한 거리감이 바탕에 깔려 있다.

  시민운동에 참여할 당시에 나는 사법연수생이었다. 그리고 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사법연수생이던 시절 나의 호칭은 “하승수 씨”였다. 참여연대 초창기 시절 참여연대 활동가들이나 회원들은 “하승수 씨”라고 불러 주었다. 그런데 연수원을 수료하고부터 호칭에 변화가 생겼다. “변호사”가 이름 뒤에 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호칭에만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를 거리감도 좀 느껴졌다. 변호사 취업과 개업 2년 만에 공익소송이나 자문을 하던 입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좀더 깊이 시민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그러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과 혼란이 생겼다. 소송과 법률자문을 벗어나서 같이 운동을 상의하고 기획하고, 같이 현장에서 뛰어보고 싶기도 한데, 나는 여전히 “변호사”였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변호사”로서 할 역할이 있었지만, 지역에서 활동을 하려고 하니 지역에서 “변호사”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지역시민운동이란 것이 동네에서 사람을 만나고 함께 활동을 만들어야 하는데, 동네에서 “변호사”란 사람들에게 괜한 거리감만 느끼게 하여 오히려 사람을 만나는 데에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

  사실 변호사는 하나의 자격증에 불과하다. 동네에서는 변호사든 누구든, 그냥 주민이고 동네아저씨일 뿐이다. 그 즈음부터 동네에서 나를 소개할 때에 주로 쓰는 메뉴는 “6단지 주민”이 되었다.
사회를 좀더 바람직하게 변화시키고자 운동을 할 때에 중요한 것은 신뢰인 것 같다. 좁은 지역내에서도 이런 저런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신뢰에 금이 간 경우들을 많이 본다. ‘신뢰’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에도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진보’라는 단어로 쉽게 묶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살아온 경험을 통해 활동이나 운동에 참여하게 된 사람은 이념적인 단어로 묶이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쌓인 신뢰가 없이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들을 본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운동을 해서 성과를 내더라도, 그것은 사상누각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변호사라고 해서, 또는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변호사라고 해서 더 신뢰하지도 않는다. 신뢰하는 듯해도 그것은 이미지에 의존한 짧은 허상일 뿐이다. 궁극적인 신뢰는 같이 활동하면서 쌓아가는 경험 속에서 나온다. 나는 그 점을 깨닫는 데에 몇 년이 걸렸다.

  신뢰는 같이 행사준비를 위해 부침개를 부치고 짐을 나르고 행사가 끝나고 뒷정리하고 설거지하면서 쌓인다. 수다 떨며 아이들 걱정도 하고,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회의를 하면서도 서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 신뢰는 쌓이는 것 같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변화하고, 다른 사람도 변화시킨다. 경험을 통해 그 운동의 의미에 대해 느끼게 되고 운동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 경험을 통해 같이 운동하는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면, 그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경험을 통해 쌓이는 신뢰. 그 보다 더 나아간다면 “입장의 동일함”일 것이다. “변호사”라는 이미지에 덧칠해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고민하고 부대끼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입장의 동일함”속에서 보다 높은 신뢰를 쌓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주민, 당신도 주민”이라는 처지에서 수평적으로 만나는 관계들이 좋은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하승수 씨”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좋다. “누리 아빠”도 듣기 나쁘지는 않다. 우리 아이 친구들이나 동네에서 같이 활동하는 분들의 아이들이 “아저씨”라고 크게 불러주는 것은 더 좋다.

  가끔 우리 사회에서 이런저런 직업이나 자격증을 가진 분들이 어디 가서 무게 잡고 이야기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좀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무슨 타이틀이나 계급장은 떼어 버리고 동네아저씨의 입장에서 뭔가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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